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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수필의 효용성 / 정목일

수필의 효용성 / 정목일

 

 

 

행복은 물질보다도 마음에 있다. ‘부자 되는 법과 함께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어느 한쪽만으로 치우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공부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수필 공부도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한다. 수필을 독백獨白의 문학이라고 한다. 독백은 자신의 마음을 모두 비워버린 경지를 말한다. 마음을 비우면 맑고 편안해진다.

마음속에 거울을 하나 달아두어서 자신의 영혼을 비춰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거울을 잘 닦아두어야 한다. 이기利己라는 먼지, 집착이라는 때, 욕심이라는 얼룩을 잘 닦아내야 한다.

마음속에 샘을 하나 파두어서 샘물로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티끌과 먼지가 쌓이게 된다. 불경佛經에서 말한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없애야 한다. 수도자가 아닌 이상 이를 제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독소를 씻어내 마음을 깨끗이 할까.

욕심이 많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음을 비워야만 대자유를 얻을 수 있고,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마음에서 매화 향기가 풍겨야 얼굴에 맑은 미소가 퍼지고 고요해진다.

마음속에 종을 하나 달아두어서 양심의 종을 스스로 울릴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비어 있지 않고선 종은 어떻게 깨달음의 소리를 듣고 울릴 수 있을 것인가.

수필은 마음을 꽃피우려는 문학이다. 누군들 일생을 통한 깨달음의 꽃을 피워놓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 소설처럼 픽션 문학이 아니고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아낸 논픽션 문학이니만큼 작품 경지가 곧 인생 경지가 된다. 인격에서 향기가 나야만 문장에서 향기가 풍기지 않으랴

수필은 심오한 지성과 냉철한 비판 정신을 지닌 산문을 추구한다. 단순한 지식과 비판 정신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바깥으로부터 들어온 앎인 지식이 아니라, 내부에서 체험을 통한 깨달음의 꽃으로 피운 것, 곧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 수필이다. 논리와 이성으로 비판하되 인본주의에 의한 따스함을 잃지 않는 것이 수필의 모습이다.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과 마음을 읽는다는 말이 된다. 한 사람의 수필집을 본다는 것이야말로 픽션 식의 작품집을 보는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이고 만나는 일이다. 수필에 있어선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방법론보다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생론이 먼저 고려돼야 한다. 수필을 잘 쓰려면 먼저 좋은 삶과 인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수필을 좋아하며, 인생의 의미와 깨달음을 주는 수필을 원한다. 문장에서 인격의 향기가 나며, 따뜻한 인간미가 우러나오는 글을 좋아한다. 해학과 정곡을 찌르는 비판으로 삶을 일깨워주는 글을 좋아한다. 시대정신과 오늘의 삶과 의식이 깃든 수필을 찾아보길 원한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과 인생을 비춰 보이는 문학이다. 교수나 학자가 노동자나 서민의 삶과 인생이 될 순 없다. 수필가마다 자신의 삶에서 피운 경지의 꽃을 피워놓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수필의 개성과 장점이 되는 동시에 한계와 단점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독자들은 서정 수필가에 대해 땀과 고뇌의 현실문제와 사회의식의 부족을 지적하고, 서사 수필가에게 감성부족과 이미지의 결여를 지적하기도 한다. 기행 수필가에게 왜 여행만을 테마로 하는가라는 질문은 쓸데없는 일이다. 꽃을 평생의 테마로 삼는 수필가에게 다양성과 소재 빈곤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약 중수필과 경수필, 서정 수필과 논리 수필로 구분할 있다면,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는 식의 논란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는 효용성의 문제이며, 독자들은 지신이 좋아하는 수필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수필을 쓰는 목적은 수필가에 따라 다를 것이나 원대한 포부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거나 구원과 같은 거창한 의식의 발로와는 거리가 멀다. 평범 속에서 진실과 감동을 얻고 깨달음의 꽃을 피워보자는 데 있다. 마음의 평온과 미소를 얻어 보자는 데 있다.

나는 수필을 쓸 때 누가 기다리고 읽어줄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심심풀이로 쓰는 경우가 많다. 너무 적막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까워 글을 써볼까마음을 낸다. 재미있는 일이 있기만 하면, 글을 쓰려는 생각이 좀체 일지 않을 것이다. 이왕 쓸 바엔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써보려고 생각한다. 혹시 독자 한 명이라도 내 글을 읽고 잠깐이라도 생각해 주는 고마운 이가 있다면 하고 자위하면서 쓴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시간의 침식에 못 이겨 퇴색되고 낡아져서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 어떤 가치와 의미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퇴색되어 잊히게 마련이다. 나도 시간의 물결에 흔적 없이 떠밀려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발버둥을 치는 행위가 수필이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필을 써오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는 자괴감이 일어 마음을 위축시키지만 자신의 삶과 인생을 기억하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한시적인 삶을 살 뿐인 인간이 영원을 수용하는 장치로써 가장 슬기로운 것이 있다면 수필 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수필 쓰기는 완성이 없을 것이다. 완벽한 인간이란 없는 것이기에 완전이나 완성에 이르는 수핑이 없다고 본다. 수필은 끊임없이 습작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치기와 평범을 넘어 차츰 달관과 깨달음으로, 평범의 경지에 비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든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치면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수필 쓰기는 마음의 경지와 인생 경지를 얻는 공부이며 과정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도 지적 과시, 성공담의 피력, 인생론의 설파, 개인사의 기록, 선전의 도구, 진실의 호도, 정신적인 사치에 목적을 둔 듯한 수필을 쓰기도 보인다. 이런 개인적인 이기와 영달에 목적을 둔 수필 쓰기는 생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 자신의 체험과 인생을 바탕으로 쓴 글이지만, 자신을 위한 글이 아니라 독자들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주는 글이어야 한다.

수필을 쓰기 전에 왜 이 글을 써야 하는가를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독백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진실 앞에 서야한다. 자신을 위한 글인지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글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독자들에게 효용성 없는 글은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의미와 가치가 되길 원한다. 한 번으로 끝나는 글이 아닌, 읽고 또 읽고 싶은 그 무엇을 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무엇이 수필의 효용성이 된다. 효용성이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문학 이론으로 쉽게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작자와 독자가 영혼 교감과 감동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오늘날의 수필 대중화는 수필의 효용성으로 확대되었다. 시와 소설의 중간 거리에서 시의 장점과 소설의 장점을 취하면서 가장 알기 쉽고 진솔하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분량과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신변잡사에서 얻어낸 삶의 발견과 의미의 확대는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의 생명과 효용성은 허위가 아난 진실에서 온다. 허구의 도입을 통해 영역 확장을 꾀해보자는 것과 상상이 없으면 문학이 아니라는 논리를 내세워 주제에 벗어나지 않는 허구의 수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수필에서도 허구 아닌 상상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 수필이 허구와 체험의 조합품이라면 소설과 무엇이 다르며 수필을 읽는 효용성이 무엇인가. 수필의 생명과 효용성은 체험과 진실을 통해 맛보는 삶과 인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