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굿 바이 / 박경대
신기한 일이었다. 여름이 막바지로 접어들었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나로부터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여 년을 같이 지냈지만 섭섭하거나 애틋한 감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는 것이 군대 이야기다. 그처럼 그곳에서의 생활은 평생토록 잊어지지 않는 사연들이 많다. 오랜 세월동안 이어진 질긴 인연의 그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군대에서였다.
삼 년의 군대생활 중 열 달 가량을 기동타격대에서 근무하였다. 하루에 한두 시간 훈련을 한 뒤에는 책도 읽고 TV를 보는 등 비교적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생활이 구속 받기를 싫어하는 나의 성격과 딱 들어맞아 의무적인 두 달의 근무기간을 끝내고도 연장근무를 신청하게 된 것이다.
타격대의 생활은 만족스러웠으나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양쪽 군화를 모두 벗으면 안 되는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5분대기조’라는 말 그대로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현장까지 5분 내에 도착해야하는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취침시간을 제외하고는 휴식시간은 물론 발을 씻을 때도 한쪽을 씻고 군화를 신은 다음 다른 한쪽을 벗어야했다.
그래도 오랫동안 생활하다보니 그런대로 지낼 만 하였다. 군화 끈을 느슨하게 묶어 신은 듯 걸치고 있다가 선임자가 눈에 띄면 얼른 신는 요령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생활을 하던 중 전역이 몇 달 남지 않아 타격대의 파견근무를 끝내게 되었다. 그즈음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낯설어하는 내가 어색했던지 가을이 되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힘들었던 군 생활은 꽃 소식과 함께 끝이 났다. 사회로 첫발을 내디딘 그해 여름, 그가 슬며시 나를 찾아왔다. 삼 년 만에 접하는 바깥생활에 마음이 들떠서인지 제대 후 첫 만남 때는 그런가보다 하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몇 날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돌며 나를 슬슬 자극하였다.
한동안 머물던 그는 어느 늦가을 온다간다 말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그리곤 잊었는데 다음해 철쭉이 질 무렵 다시 찾아왔다. 그렇게 매년 초여름이면 찾아와서 나의 곁에 머물다 늦가을이 되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런 그가 처음에는 무척 거슬려 싸움도 해보았지만 끝까지 버티려는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한 해 두 해 매년 만남이 반복되자 미운정이 들었는지 어느 여름밤 불쑥 찾아와도 그저 ‘왔냐’ 하고 무덤덤해지고 말았다. 또한 그가 큰 피해를 끼치지도 않고 백 일 남짓 지내다 가버리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그와의 불편한 동거를 무척 싫어하였다. 그랬던 그가 작년에 있었던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어 나로부터 영영 떠나게 된 것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K형부부가 있다. 한동안 살던 아파트에서 새로운 아파트로 분양도 같이 받아 알고 지낸지가 근 이십 년이 되었다. 비슷한 연배였으며 출퇴근 때도 가끔 만나다 보니, 십여 년 전부터는 매달에 한 번씩 동부인하여 소주잔을 기울이고 회비도 모으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지난가을의 어느 날, 식사를 하던 중 통장을 보았더니 모인 돈이 꽤 되었다. 견물생심인지 돈을 보자 네 명 모두 의기투합하여 다음해 여름 중국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오랜만에 가는 해외여행에 아내는 무척 들떠 있었다. 까마득히 남은 날짜에도 불구하고 여행사의 일정을 알아보고 경비도 따져보며 여행을 준비하였다. 며칠 동안 인터넷과 씨름을 하던 아내가 드디어 한 장의 일정표를 뽑아내었다.
‘장가계’와 ‘천문산’ 그리고 뮤지컬 감상과 동굴탐험 등 일정표의 내용이 아주 화려했다. 게다가 오성급 호텔에 매일 저녁 발마사지도 들어있는 그야말로 중국여행으로는 최상급이었다.
아내와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일정표를 무심히 보던 중 갑자기 여름이면 찾아오는 그가 떠올랐다. 틀림없이 그도 따라올 것 같았다. 아내에게 이야기하자 절대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짜증을 내었다. 어쩌나하고 생각해 보니 심각한 문제였다.
다음날 K형에게 일정표를 보여주면서 여름마다 찾아오는 그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K형은 이야기를 듣더니 아직까지 찾아오는 사실에 놀라면서 그런 놈을 잘 떼버린다는 전문가 한사람을 소개시켜주었다.
다음날 적어준 주소로 전문가를 만나러갔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 여럿이 상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뒤 그동안 있었던 그와의 관계를 첫 만남부터 그를 떼버리려고 그동안 기울인 노력까지 빠짐없이 이야기 하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그는 비약과 몇 가지 사항을 적어주며 그대로 실천하면 틀림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하였다.
상담료를 지불하고 돌아오면서 지켜야할 사항을 보니 첫 번째가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지저분한 것을 좋아하는 그를 보내려면 항상 깨끗이 하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는 일정한 시각에 비약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전문가의 말을 쫓아 노력하였다.
중국을 다녀 온 몇 달 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어디서 들었는지 떠나버린 그 친구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친구야 ! 너 무좀이 완전히 나았다며? 이제는 발 마사지 받아도 창피하지 않겠다,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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