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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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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닮음에 대한 아이러니 / 박영란 닮음에 대한 아이러니 / 박영란 '꼭 너 닮은 딸 하나 낳아 키우라는 말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어느 수필의 한 대목이다. 딸을 타지로 시집보내고 매번 서울역에서 울었던 어머니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돌아서 가는 딸의 매정함이 서운했다. 그래서 던진 말이다. 엄마의 애틋해하는 이별에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으련만.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이 담에 꼭 너 닮은 자식 낳아 키워봐라" 하는 어머니의 목멘 소리 한 번 듣지 않고 자란 자식이 있을까. 큰 잘못도 아닌 일에, 사소한 일상에서 문득 원망과 한숨이 섞인 이런 푸념이 직격탄처럼 날아오지 않았는가. 자식들은 대개 이 뜨악한 소리에 뭔가 찔끔하기도 하지만, 내심 '내가 왜?' '내가 어때서' 하는 작은 저항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
[좋은수필]새로고침 / 김희정 새로고침 / 김희정 어제 나는 죽었다. 전원이 꺼져있었다. 오로지 하루만 기능하며 설치되고 삭제된다. 매일 화면에 떴다가 사라지곤 한다. 내 인격은 날마다 모양을 바꾼다. 그날 만난 사람들과 장소에 어울리는 코드를 택하여 조합되고 개발되며, 고쳐져 삶을 주무른다. 종일 가면일 때도 있고, 베일일 때도 있으며, 민낯일 때도 있다. 다름은 외형을 바꾸어 드러나지만,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장치들은 계속 에러 신호를 보낸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이기적인 삶은 누구나 살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편리함에 쉽게 현혹되지 못하고 불편함을 뒤척인다. 끝없이 편리한 자유에 경계를 그어가는 이타적 삶을 택한다. 그 버팀은, 자기 최면이다. 그것은 어쩌면 간단하다. 자기를 감추고 숨는 것이다. 비공개 설정이다. 내면의 텍스트..
[좋은수필]고등어 / 조현미 고등어 / 조현미 트럭 한 대가 들어선다. 윤슬 너울거리는 강을 건너, 마을 어귀로 몸을 틀더니 가풀막을 용케도 거슬러 오른다. 바람이 쪽빛 포장을 들출 대마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흘러나온다. “자아 생선이 왔습니다. 생선이 왔어요. 펄펄뛰는 고등어, 팔뚝만 한 갈치 들여가세요. 산 넘고 바다가 왔습니다. 어서 나오셔서 싱싱한 생선 들여가세요….” 생선 장수가 짐칸을 열자 왈칵, 비린내가 쏟아진다. 자못 구성진 입담이 질펀하게 촌을 적시고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든다. 삼거리가 이내 파시처럼 왁자해진다. 먼 여정에 지쳐 눈이 풀린 동태, 은빛 비단옷의 갈치며 장정 손바닥만 한 병어랑 알배기 주꾸미, 세상 구경 나온 꼬막의 주홍빛 속살…. 생선 장수 말마따나 바다가 통째로 들어온 것 같다. 개중 촌로들의 눈..
[좋은수필]지금 몇 시냐 / 전미란 지금 몇 시냐 / 전미란 "몇 시 몇 분입니까? 시간을 구하시오." 초등학교 때 시계 보는 법을 몰라 종종 나머지 공부를 했다. 방과 후면 종이 위의 시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그란 시계의 모양과는 달리 머리는 잘 굴러가지 않았다. 시침과 분침이 직각을 이루거나 포개지는 문제는 쉬웠지만 긴 바늘이 조금만 움직여도 짧은 바늘은 어느새 정각을 벗어나 풀기 어려웠다. 짝꿍은 시간의 비밀을 다 풀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이게 뭐가 어렵다고…." 하면서 어이없어했다. 나는 운동장 느티나무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집에 갈 시간만을 기다렸다. 어릴 적, 어머니는 시계에 밥이 떨어졌다며 나를 부르시곤 했다. 안방 윗목 높이 괘종시계가 붙어 있었는데 밥을 주는 일은 늘 내 차지였다. 유리문을 열고 밥을 주면..
[좋은수필]별똥별 / 강돈묵 별똥별 / 강돈묵 방파제에 고등어 떼가 붙었다고 야단이다. 오랜만에 따라 나선다. 제철만 만나면 고등어 낚시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 물론 고수들이야 그게 무슨 낚시 축에나 드느냐며 얕잡아볼지 모르나 손맛만은 그만이다. 긴 시간 기다림 끝에 피아노 줄을 튕기며 끌려 나오는 감성돔의 손맛을 최고로 치지만, 그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어쩌다 재수가 좋아야 겨우 맛보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고등어는 다르다. 떼로 몰려오면 바닷속이 온통 고등어다.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다. 이때에는 바닷물의 빛깔도 거무칙칙하게 우러난다. 고등어 낚시는 밤에 해야 제 맛이다. 수면 가까이 회유하기에 굳이 낚싯줄을 길게 늘일 필요도 없다. 수심 이삼 미터로 하여 찌를 달고 거기에 선 라이트를 꽂으면 준비는 끝이 난다. 낚싯바늘..
[좋은수필]연잎밥 / 조경숙 연잎밥 / 조경숙 포개듯 돌려가며 동여맸다. 밥은 하루를 잇는 징검다리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사 일상의 소박 연잎밥을 지었다. 큰 솥뚜껑을 열자 향을 껴안은 주먹만 한 연밥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오뉴월 땡볕에 싸움질을 하던 아이들이 마치 한 이불 속에 서로의 몸을 포갠 채 잠자는 모습 같다. 하나 둘 조심스레 펼치니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는 김이 오른다. 평소 '옴마밥'이라며 찬 없이도 밥그릇을 단숨에 비워내던 열 명이나 되는 식솔들은 연밥을 싸는 동안 신기한 듯 하나둘 얼굴을 들이밀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굳이 이런 풀이파리에 밥을 싸는 이유가 뭐냐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내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한 주걱씩 푼 밥을 연잎에 올리고 고명으로 대추 은행 잣을 올려 마음을 ..
[좋은수필]수필이 내게 오기까지 / 남태희 수필이 내게 오기까지 / 남태희 사람들은 내게 왜 글을 쓰는지 묻는다. 아니 스스로 질문한다. 물음 끝에 얻는 답 가운데 첫 번째는 자연풍경이 글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울진이다. 하지만 기억이 시작되는 곳은 다섯 살 무렵 경북 영양의 수하계곡이다. 이후 다시 산 하나를 넘어 울진군의 왕피리로 이사를 나왔으니 수하계곡을 돌아 나온 강물이 왕피천이 되는 것처럼 깊은 숲과 머물지 않고 흐르는 강물을 보며 자란 사람이 글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어쩜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싶다. 영양의 수하계곡과 울진의 왕피천이 내 유년의 시작이었음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져 왕래가 쉬워졌지만 예전에는 등허리 굵어 손 안 닿는 곳이 울진이라고 했다. 울울창창 ..
[좋은수필]볍씨 / 황진숙 볍씨 / 황진숙 한 톨의 낟알이 숨을 고르고 있다. 수천 년이 응축된 깊고 고요한 숨이다. 숨 속에서 담지된 여러 겹의 시간이 허공을 감싸며 일렁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벗어난 탓일까. 묵연한 자태가 풀어놓은 절대고요에 사방이 말간 빛깔로 물들어간다. 저토록 작디작은 몸 안에 생명을 궁굴려 문명을 잉태했다니. 거친 수피를 몸에 두른 것도 아니고 질긴 뿌리도 없이 세상을 읽어낸 몸짓이 담담하다. 타원체에 깃든 볍씨의 생명살이가 웅숭깊기만 하다. 씨앗의 희망을 찾아 나선 길이다. 신석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양가와지볍씨 박물관이다. 오천 년 전에 태동한 볍씨의 체온이 살아 있는 곳. 가녀린 껍질에 햇살과 바람의 숨을 들여 맥박을 일으킨 알곡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영혼 가진 모든 이에게 충만함을 주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