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1000)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노을이 내게로 왔다 / 김도우 노을이 내게로 왔다 / 김도우 오후가 되면 노을이를 데리고 바닷가에 나간다. 노을이는 가고 싶은 곳이 많은지 앞장서 간다. 밖에만 나오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럴 때면 내가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간다. 노을이는 바다냄새를 맡느라 코를 연신 벌름거린다. 바닷가에서 놀던 돌게가 종종걸음을 치고 나오다 호기심 많은 노을이한테 잡혀 바둥거린다. 돌게도 여간내기가 아니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 빨간 집게발을 세워 노을이를 위협한다. 노을이의 공격을 피해 잘도 빠져나간다. 돌게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탐색하다 제상대가 아니다 싶었는지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십년감수한 돌게가 풀섶 사이로 줄행랑을 친다. 노을이는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자세를 취하다 갑자기 포복자세를.. [좋은수필]모서리의 변명 / 남태희 모서리의 변명 / 남태희 내질러지지 않는 소리를 삼킨다.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저 주저앉아 부딪힌 이마를 문지르며 오금을 옴찔옴찔 비틀어 본다. “어우야!”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리가 터져 나온다. 거울을 보니 책상 모서리에 찍힌 이마에 벌겋다 못해 검푸른 자국이 선명하게 올라왔다. 푸른 멍이 일주일은 족히 갈 것 같다. 다시 신음이 나온다. 사무실 책상과 책상 사이에 떨어진 볼펜 한 자루를 줍다가 모서리에 이마를 옹골차게 부딪쳤다. 여덟 평이나 될까 한 사무실에 싱크대며 냉장고, 책꽂이에 책상 두 개, 둥근 테이블까지 들어차 있어 조금만 몸을 과하게 움직이면 뭔가 떨어뜨리거나 어딘가에 부딪힌다. 조심성을 잃는 순간 사고가 터지는 법이다. 물건에게나 사람에게나 그 이치는 별반 다르지 않.. [좋은수필]객토 / 김상환 객토 / 김상환 텃밭에 객토客土 작업을 했다. 객토란 산성화되었거나 질 나쁜 토양 위에 새 흙을 넣어 땅의 힘을 상승시켜 주는 작업이다. 지난날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 우리 집에는 산을 깎아 만든 논이 있었다. 그 논은 원체 박토라서 아무리 애써도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다. 애쓴 보람도 없이 부득이 갈아엎었다. 그때마다 돌을 골라내고 퇴비를 듬뿍 주었다. 하지만 갈아엎을 수 없는 땅이 있다. 돌도 아니고 흙도 아닌 비륵땅은 쟁기로도 갈 수가 없다. 삽 끝도 들어가지 않으니 곡괭이로 조금씩 파내야 한다. 이런 땅은 객토를 해야 한다. 어린 시절 내 삶의 땅이 바로 그런 비륵땅이었다. 혹독한 가난 속에 아버지는 내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돌아가시고, 건강까지 좋지 않았다.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일을 했다. 낮.. [좋은수필]돌아갈 수 없어 다행이다 / 김수인 돌아갈 수 없어 다행이다 / 김수인 고흐의 그림 을 보고 있다. 알곡이 오달지게 붙은 밀 짚단 세 개를 한데 묶어 빈들에 세운 그림이다. 세계적인 명작 을 감상하는데 왠지 내 눈엔 고단한 내력만 어른거린다. 밀알은 많은 종자를 얻기 위해 제 한 몸 썩히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란 듯 견뎠으리라. 서릿발 세운 겨울 밭에서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잔뿌리를 키웠고, 봄비를 흠뻑 들이키며 양분을 잣아 올렸을 테다. 빈 대궁으로 바람에 휘청거리면서도 알곡만은 토실하게 영글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을 터이다. 나는 지금 그림 앞에서 옹골찬 밀단을 탈곡기에 들이대는 작업을 상상한다. 순식간에 알곡은 떨어지고 빈 짚단만 남는다. 내 허리마저 쭉 펴지는 느낌이다. 몇 년 전, 큰아들이 결혼해서 분가를 하자 지인들께서 허전하지.. [좋은수필]공터 / 최장순 공터 / 최장순 "내 젊었을 땐 덩치가 이마-안 했어." 호기 좋은 목소리를 따라 내 고개가 돌아갔다. 전철 휴게실 의자 옆, 두 팔로 아름드리나무를 껴안듯 포즈를 취하고 서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솔깃한 귀를 모아 앉은 또래의 노인들이 마치 무용담을 듣는 아이들 같다. 노인의 말을 귀동냥하던 나는 씨익 웃고 말았다. 작은 키와 홀쭉한 몸을 봐서는 한때 풍채 좋았다는 노인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인에게도 분명, 말처럼 풍채 좋던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젊음과 노동을 모두 비워낸 몸, 약간은 과장된 소싯적 추억 한 토막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이 묻어왔다. 노인의 말이 내내 전철의 요동과 함께 흔들렸다. 빈 몸, 비워진 터, 공터 같은 단어들이 차례로 통과하는 전철역 이.. [좋은수필]글을 쓰는 재능 / 김상태 글을 쓰는 재능 / 김상태 일본의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그의 웹사이트에서 한 말이 묘하게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여자 대학원생이 한 질문에 대답한 말이란다. 질문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라 매번 낑낑대고 있지만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글을 좀 더 쉽게 쓰는 방법이 없을까요?"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한 하루키의 대답은 간단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여자를 말로 꾀는 것과 꼭 같아서 어느 정도까지는 연습으로 잘 되지만 기본적으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야 합니다." 말로 여자를 꾀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도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글 쓰는 것을 이렇게 거침없이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하루키다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좋은수필]바다를 건널 때 / 최순희 바다를 건널 때 / 최순희 바다는 내게 원래 동해나 남해가 전부였다. 특히 남해, 올망졸망한 작은 섬들이 쉼표 마침표처럼 아기자기 떠 있는 통영 앞바다와 삼천포에서 창선대교를 건너 다랭이논을 향해 해안도로를 달릴 때면 차창 밖으로 윤슬 일렁이는 그 남해가 좋았다. 한자리에서 깊고 그윽하지 못하고 갯벌을 적나라하게 벌거벗기며 하루 두 차례씩 들락날락하는 서해는, 그 누렇다는 소문과 함께 내게 서해도 바다냐는 비아냥을 함부로 내뱉게 했었다. 그러던 내가 서해 바닷가에 들앉아 산다. 이 섬에 흘러들게 한 우연인지 필연인지에 매일매일 감사하며 산다. 어느덧 만 4년, 공항 근처에 그의 은퇴 후엔 멀리 있는 피붙이들 만나러 날아가기 편하겠단 막연한 이유로 집을 마련해두긴 했어도 정말로 들어와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좋은수필]달팽이 뒷간 / 노혜숙 달팽이 뒷간 / 노혜숙 '달팽이 뒷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붕 대신 한 평 하늘을 들였고, 문 대신 서원 뜰 한 자락을 들였다. 이끼 낀 진흙돌담은 달팽이처럼 안으로 휘었고, 풍화의 흔적이 스민 잿빛 이엉은 서원 지붕과 어우러져 한 풍경을 이루었다. 그 옛날 머슴들의 배설과 애환이 질펀하게 부려지던 '통시'의 공간. 뒷간 옆엔 배롱나무 꽃이 천연스럽게 붉었다. 10리 길을 걸어 들어가야 진면목을 알게 된다던가. 팔월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은 몽환적이었다. 염천의 농익은 볕처럼 붉은 꽃들이 서원 안팎에 흐드러져 피었다. 풍경 속에 건물이 있고 건물 속에 풍경이 들어와 한통속이 된 듯 조화로운 전경이었다. 입교당(立敎堂)에 올라 바라보는 만대로 풍광은 서원의 백미였다. 시선을 들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우뚝.. 이전 1 ··· 4 5 6 7 8 9 10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