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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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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칼 / 장미숙 칼 / 장미숙 칼을 들었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칼이 번쩍, 뜨거운 빛을 뿜는다. 날카로운 날을 쓱, 한번 행주로 닦아준다. 다섯 손가락에 힘을 골고루 실어 칼자루를 잡는다. 칼자루가 손에 착 달라붙는다. 체온을 나눈 지 오래되었다는 뜻일 거다. 믿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친숙함에서 우러나는 편안함이기도 하다. 이젠 칼날을 허공에 놓을 시간이다. 수평으로 허공에 꽂힌 칼날, 냉정하다. 뭔가를 잘라야 할 때의 그 냉철함이 손끝에 전해진다. 칼의 본분은 자르는 것, 남겨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갈은 이지적이다.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리는 일에 익숙한 칼은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오 센티미터 허공에 걸린 긴 칼이 표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 자신이 꽂힐 자리를 가..
[좋은수필]세상은 불난 집 / 조 헌 세상은 불난 집 / 조 헌 보통 뜨거운 날씨가 아니다. 한낮엔 활활 타는 불길 속같이 등줄기를 훅훅 볶아대더니 해가 져도 숙일 줄 모르는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후, 올 여름(2018)이 최악이라는데 아마도 유사 이래 가장 심한 폭염이 아닐까 싶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각, 지하철에서 내린 나는 땀범벅이 되어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날씨 탓인지 평소엔 사람들로 북적거릴 강남역 5번 출구가 차도 사람도 뜸한 채 한산했다. 큰길을 벗어나 작은 사거리에서 막 왼쪽 길로 접어드는데 길모퉁이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술에 취했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냥 갈까 싶었지만 이 모서리는 턱이 없어 차들이 수시로 넘나드는 곳이라 위험했다.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
[좋은수필]밥그릇 춤 / 하재열 밥그릇 춤 / 하재열 문을 따고 내민 안노인의 얼굴이 곰삭은 삼배 주름 같다. 도시락을 받아들고 다시 이부자리를 찾아 가는 뒤뚱거림이 불안하다. 방 안에서 장마철 같은 후더분한 열기가 덮쳐 나온다. 한 줄 복도에 이어진 끝 집, 이번엔 힘에 부치는 듯 손을 내민 노인장이다. 아파트 몇 층을 오르내렸다. 현관문에 도시락 봉지를 걸어 두고 온 한 곳이 마음에 걸린다.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아프리카 사바나, 한 마리 사자가 초췌하게 서성거리다 홀로 무리를 떠난다. 더는 사냥할 수 없게 된 다리를 쩔뚝이며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 뒷모습이 처연하다. 초원의 덤불 어딘가에서 다른 생의 먹이로 해체된 형해의 몰골로 드러누우리라. 나는 원초적 본능이 춤추는 사바나가 좋다. 물고 물리는 끝없는 광야의 생동감..
[좋은수필]달팽이의 꿈 / 박금아 달팽이의 꿈 / 박금아 지루한 장마였다. 홈통을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에 밀려 오랜만에 베란다 청소를 했다. 화분을 밀어내고 물을 부으려고 할 때였다. 황갈색 온돌이 달팽이 한 마리가 흙 부스러기 위를 한가로이 기어가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물은 양동이를 떠나 해일처럼 돌진했다. 조난당한 배처럼 파도에 갇힌 신세가 된 달팽이를 건져 모종판에 놓아주었다. 비 오는 날이면 마당으로 나오던 달팽이를 잡아 담장 너머로 내던져 버리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래. 너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갈 때까지 기다려주마. 그만으로도 인연인가. 오며 가며 지켜보게 되었다. 녀석은 낮 동안에는 껍질 속에서 꼼짝 않고 있다가 저물녘이면 빠끔히 목을 빼고 나와 화초 줄기를 오르다가 내..
[좋은수필]아름다운 풍경 / 정목일 아름다운 풍경 / 정목일 ‘풍경’은 바람과 경치가 합해진 말이다. 두 개 이상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 경치는 정적인 것이며, 바람이 있어야한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겨울 해 질 녘 느티나무가 노을을 배경으로 빛을 뿜는 듯 보이는 건 제 혼자만으로서가 아니다. 한 잎도 남김없이 떨쳐버린 가지들이 수백 갈래 하늘로 뻗친 모습은 섬세하고도 날렵하다. 노을빛과 어둠에 묻힐 산 능선과 어울리지 않았다면 경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풍이 든 숲길이 황홀한 것은 오래지 않아 화려한 색채들이 사라지기 때문일 게다. 낙엽을 밟으며 그 길을 벗어나기가 아쉬워 뒤돌아보기도 한다. 그 길이 더 정다울 때란 노부부나 연인들이 걷는 모습을 보는 순간이다. 미음이 끌리는 곳에서 사랑의 고백은 이뤄지고 별리도 나누게 된다. 함박..
[좋은수필]여전하십니다 / 권현옥 여전하십니다 / 권현옥 드디어 앉았다. 한숨 돌리는 기분이 달큼하다. 미용실 의자에 앉는다는 것은 즉흥적 도발이 아니라 벼르던 일을 간신히 하는 일이다. 나의 하루 중 틈새 시간이 어디쯤인지 잘 구분해 떼어 놓고 미용실에 전화한다. 그쪽 시간과 나의 시간이 반가워해야 앉을 수 있다. 시간이 정해지면 마지막 결재를 한 듯 후련하다. 이제야 시간이 좀 났다는 것이고 피치 못하게 꼭 손질해야 할 일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엔 변신의 계획이 갈팡질팡해서 미용실 앞에서 돌아선 적도 있고 때론 결의가 불끈 발동하는 바람에 의자로 뛰어가 앉고 본 일도 있었다. 이제는 바쁜 건지 게으른 건지 느긋한 건지 알아내기 미묘하다. 앉아야 할 때를 한참 넘기고 거울을 보면 나와 닮은 모르는 사람이 지루하게 쳐다보는 느..
[좋은수필]의재정아 / 강천 의재정아 / 강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새하얀 두루마기가 참 잘 어울리는 분이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자태는 한 마리의 고고한 백학을 닮은 듯하다. 퇴계 종택의 추월한수정에서 젊은 객은 편안하게 앉고, 미수를 바라보는 노학은 무릎을 꿇은 채 꼿꼿한 자세로 마주한다. 아무리 불학무식이기로서니 민망함에 몇 번이나 편하게 하시라 권해보아도 습관이라서 괜찮다는 말씀만 거듭한다. 그렇다고 같이 꿇어앉자니 당장 다리가 저려와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다. 어쩔 것인가, 못 이기는 척 권하는 대로 책상다리를 하고 퍼질러 앉았다. 이조차 몸에 익숙하지 않아 잠시간에 사지가 뒤틀려 온다. 반듯한 자세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선유의 현묘한 가르침을 청하려 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후학의 무례에도 미소를 머금은 온화한..
[좋은수필]내버려두기 / 남태희 내버려두기 / 남태희 지금은 7월 말,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백화점과 마트에서는 바캉스 용품 대전이 열리고 덩달아 사람들의 마음도 날씨처럼 달아오른다. 수영복을 고르고 밀짚모자를 써 보고 야자수 무늬가 이국적인 롱원피스를 쓰다듬어 본다. 편하게 신을 샌들을 신어보고 달아오른 태양을 비켜 갈 선글라스도 고른다. 여행 준비가 반쯤 완성된다. 나머지는 잔뜩 부푼 마음이 차지한다. 여행 가방은 사각의 애드벌룬이 되어 둥둥 마음을 띄우고 몸보다 앞서 여행지에 도착한다. 작년 구월 초,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여행을 감행했다. 베트남의 다낭과 호이안을 친구와 둘이 떠났다. 항상 단체여행으로 휩쓸려 다니다 구글 지도를 찾아가며 여행하려니 두렵기도 했지만 짜릿한 기쁨이었다. 골목길을 헤매다 되돌아 나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