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정아 / 강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새하얀 두루마기가 참 잘 어울리는 분이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자태는 한 마리의 고고한 백학을 닮은 듯하다.
퇴계 종택의 추월한수정에서 젊은 객은 편안하게 앉고, 미수를 바라보는 노학은 무릎을 꿇은 채 꼿꼿한 자세로 마주한다. 아무리 불학무식이기로서니 민망함에 몇 번이나 편하게 하시라 권해보아도 습관이라서 괜찮다는 말씀만 거듭한다. 그렇다고 같이 꿇어앉자니 당장 다리가 저려와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다. 어쩔 것인가, 못 이기는 척 권하는 대로 책상다리를 하고 퍼질러 앉았다. 이조차 몸에 익숙하지 않아 잠시간에 사지가 뒤틀려 온다. 반듯한 자세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선유의 현묘한 가르침을 청하려 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후학의 무례에도 미소를 머금은 온화한 얼굴로 가계와 종택의 내력, 현판에 새겨진 글귀의 의미를 조곤조곤 일러준다. 품격이란, 어른의 이런 모습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굳이 학문을 내세워 떠들지 않아도, 거만하게 배 내밀고 눈을 내리깔지 않아도 절로 드러나는 모양이다. 가는귀 어둑한 것도, 목소리가 가녀린 것조차도 내재한 인품의 부분처럼 보인다. 예전의 선비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되 현대에 선비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퇴계 선생의 드높은 학문도, 유학의 도리도 이 순간에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처음 들어설 때는 무엇 하나라도 챙겨갈 듯 제법 호기로웠지만, 종손 어른을 마주하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세상사의 근본이 무엇이었던가. 내가 그토록 입에 달고 살았던 ‘마음가짐’임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 여태껏 주절거렸고 휘갈겨대었던 것들이 한갓 말장난, 글 장난과도 같이 영혼 없었음을 생각하며 홀로 탄식한다. 초지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이 반듯한 자세 앞에서.
내어준 차가 차갑게 식고 나서야 어른의 말씀이 끝을 맺었다. 좋은 말씀에 대한 고마움보다도 굳은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데 대한 반가움이 먼저 몰려온다. 이것이 내가 가진 내면의 속물적 품성이었음을 다시 확인하고는 고소를 머금는다. ‘그릇의 크기대로’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좋은 말씀도 담을 수 있는 내 그릇의 크기대로 담아가면 될 일이라며 자조한다. 구차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핑계가 어디 있겠는가.
일어서는 발길을 도로 주저앉히고 봉투를 하나씩 건네주신다. ‘의재정아’(義在正我), 사람의 도리란 자신을 바르게 하는 일이라고 덧붙여준다. 순간, 가슴에 천근의 쇳덩이가 내려앉는다. 거창한 명문도 세인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명구도 아니건만 내려쓴 붓글씨가 송곳이 되어 가슴을 찔러온다. 하아, ‘의를 세우는 길이 자신을 바르게 하는 일’이라니. 아옹다옹 하루를 살아가는 내게는 너무나 아득한 일처럼 느껴진다. 이토록 좋은 문구를 받아들고서도 기쁜 마음은커녕 왜 한숨이 먼저 나오는 것일까. 손바닥보다 작은 이 종이 한 장이 이렇게 무거울 줄이야.
문구를 내린 어르신의 뜻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루라는 것이겠는가. 마음에 새겨두고 쉼 없이 닦아가라는 의미일 터. 가을 달빛같이, 차가운 물같이 깨끗한 선비의 마음을 배워 보고자는 기대를 안고 정자에 올랐었다. 한데, 오를 때의 호기로움은 어디 가고 되돌아 돌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오히려 휘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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