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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여전하십니다 / 권현옥

여전하십니다 / 권현옥

 

 

 

드디어 앉았다. 한숨 돌리는 기분이 달큼하다.

미용실 의자에 앉는다는 것은 즉흥적 도발이 아니라 벼르던 일을 간신히 하는 일이다. 나의 하루 중 틈새 시간이 어디쯤인지 잘 구분해 떼어 놓고 미용실에 전화한다. 그쪽 시간과 나의 시간이 반가워해야 앉을 수 있다. 시간이 정해지면 마지막 결재를 한 듯 후련하다.

이제야 시간이 좀 났다는 것이고 피치 못하게 꼭 손질해야 할 일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엔 변신의 계획이 갈팡질팡해서 미용실 앞에서 돌아선 적도 있고 때론 결의가 불끈 발동하는 바람에 의자로 뛰어가 앉고 본 일도 있었다. 이제는 바쁜 건지 게으른 건지 느긋한 건지 알아내기 미묘하다. 앉아야 할 때를 한참 넘기고 거울을 보면 나와 닮은 모르는 사람이 지루하게 쳐다보는 느낌이다.

머리를 한다는 것은 내심의 단락을 짓고 싶거나 단절의 시점으로 삼고 싶다는 의미가 있었다. 갈등이 마음을 조일 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머리라도 잘라버리고, 약에 절게 하고, 낯설게 해서 이전의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뿌리침이었다. 그것이 무시로 필요했던 격정의 시간이 지나자 다른 의미가 재촉한다.

오랜만에 보는 지인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나 이하를 보이고 싶지 않은, 이미지 유지 차원의 경우고 세월에 대한 방어태세가 되었다. 푸시시한 머리칼 아래로 대열을 갖추고 단합한 듯 쑥 나선 흰머리는 제 나름 씩씩하게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씩씩'의 반대로 기운이 빠져 버린다. 나대지의 강아지풀처럼 을씨년스럽게 보이면 세월이 끌고 온 무감각을 그대로 방출하는 느낌이라 부끄러워진다. 미용실에 앉는 것은 돋보이려는 게 아니라 게을러 보이지 않기 위한 나름의 처세다.

머리를 맡겼으니 잠시 쉬고 싶다. 눈을 감으면 잡념이 평수를 넓히고 눈을 뜨면 거울 너머로 맘에 들다가도 안 드는 얼굴이 보인다. 머쓱하여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속으로 친지들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본 나에게 "너도 늙어가는구나, 얼굴에 연륜이 보이네. 어릴 때 그리 귀엽더니만."라고 말한 사촌오빠가 떠올랐다.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때가 파마와 염색할 때를 놓치고 당황 중에 장례식장으로 갔을 때였다. 맞는 말이어서 놀랐다. 하얀 거짓말이라도 여전하다거나 똑같다거나 늙지도 않았다는 말을 즐겨 들어왔다. 내가 건넨 말도 추려 보았다. "여전하시네요." "건강해 보이시네요." 집안 어르신에게 버릇처럼 한 그 말이 참 좋은 인사라는 생각과 함께 여전하게 보이는 모습이 진심으로 반갑고 고마웠다.

여전하다는 말은, 전과 같다거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못함도 더함도 없이 생각한 대로니 쉽게 반가워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간혹 부정적인 말의 뜻이 들어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서로 간 알고 있는 습성의 인정인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사람의 변화 앞에서는 멈칫한다. 놀라움과 낯섦이 좋아 보여서든지 멋져 보여서라면 좋겠지만 그 반대도 있다. '아니 왜 이리 늙었어, 말랐어, 뚱뚱해졌어, 우울해 보여, 병색이야'라는 말을 이미 맘속으로 외친 경우는 표정을 다스려야 한다. 어찌 그 구체적 단어를 노출시키겠는가.

여전하다는 말은 편해진 나이가 된 걸까. 예전엔 그 말이 싫었다. 발전도 없고 그냥 그저 그렇다는 심드렁한 평으로 받아들였다. 변해 보이거나 색다르게 보이길 바랐나 보다.

그날 누군가가 고모부의 손을 잡으며 "아구, 왜 이리 늙었어?"라고 말했다. 몹시 듣기 언짢았지만 여전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빨리 튀어나왔으리라 생각했다.

커트가 다 끝나 눈을 떴다. 미용사가 "하던 대로 할까요?" 묻는다. 매번 하던 대로 해달라고 했던 것과 달리 "좀 바꿔볼까 봐요." 했다. 빨리 풀려 귀찮으니 정수리 부분만 강한 웨이브를 넣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생기가 굼실굼실 솟아오를 것 같았다.

파마가 시작됐다. 다시 눈을 감았다. 여전하지 못해 오는 소식들, 세상을 하직했거나 발병의 소식이 쑥쑥 쳐들어오는 요즘, 여전하다는 말은 참 괜찮은 말이라고 인정하려는데 그것도 욕심이라고 내 속에서 작게 들려온다.

다시 눈을 감고 있다가 떴다. 머리 손질이 다 되고 거울을 보면 언제나 그랬다. 이전 머리가 더 자연스러웠다. 어색한 나를 못 참아 웨이브를 잘 눌러주고 방향을 잡아주고 삐침을 달래주려면 더 애써야 한다. 일상도 늘 그랬다. 잠깐의 새로움은 그랬다.

며칠 후 행사장에서 지인이 "여전하시네요." 한다. 난 좀 바꾼 것 같은데 그건 아닌가 보다. 다행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