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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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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배웅 / 안량제 배웅 / 안량제 생전 처음 하는 배웅이라 마음이 설렌다. 배웅이란 아무에게나 선뜻 하는 일이 아니다. 웃어른이나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가 방문하고 돌아갈 때 전송하는 예의다. 문 밖까지 잠시 나와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는 것이 상례다. 가까운 친지나 친구기 먼 길 떠날 때 바쁜 시간 쪼개서 기차역이나 버스정류장까지 전송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버스 터미널로 나갔다. 죄 짓는 일도 아닌데 가슴이 뛰고 주위에 신경까지 쓰였다. 그가 시골에 사는 언니가 보고 싶어 가는 시골길이다. 차를 세 번갈아 타야 하는 먼 길인데도 동행 없이 외로운 여행길이 쓸쓸하고 외로울 거라는 생각을 하니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언니가 보고파 하루를 꼬박 가야하는 먼 길을 마다 않고 한사코 가고..
[좋은수필]호박 예찬 / 노덕경 호박 예찬 / 노덕경 봄에는 만물이 솟아나고,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삶도 마찬가지다. 청춘엔 용기가 솟구치고 노년엔 보람을 얻는다. 자연은 가을이면 풍성한 먹거리를 준다. 들에는 오곡이, 산에는 과일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리고, 초가지붕엔 누런 호박이 익어간다. 인생의 가을을 맞아 흐른 세월이 안타깝고, 허투루 낭비한 것 같아 서글프다. 신혼살림을 직장 따라 객지에서 시작했었다. 오곡을 거두어들일 때쯤, 아내는 월세 집에서 첫아이를 출산했다. 전화기가 없어 허둥대다 우체국에 가서 출산소식을 부모님께 전했었다. 마침 서울 처형이 고향 갖다 집에 들렀었고, 농번기라 늦게 어머니가 올라와 산후조리를 했었다. 시골 처형이 산후통에 좋다며 누렇게 익은 호박을 보내준 것으로 몸조리를 했다. 그 계기로 ..
[좋은수필]골목이 변하고 있다 / 송연희 골목이 변하고 있다 / 송연희 옆집이 팔렸다. 새 주인이 집수리 공사를 시작했다. 골조만 남기고 H빔을 박은 뒤에 다 헐어냈다. 집을 샀다는 여자가 과일 한 상자를 들고 왔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여자는 체구가 마르고 작았다. 그녀는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다고 하였다. 나는 공사비가 많이 들겠다고 했고, 그녀는 생각한 것보다 추가 비용이 만만치 한을 거라며 콧잔등을 찡그리고 웃었다. 가림막을 걷어낸 집은 예전의 모습과는 그야말로 딴판이었다. 환골탈태란 바로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오래된 붉은 벽돌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흰 벽과 회색빛의 단조롭고 깔끔한 학원 건물이 탄생했다. 이웃사람들은 주택지 안에 학원이 생겨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학원은 비교적 조용했다. 영국 유학을 ..
[좋은수필]벌레 / 송연희 벌레 / 송연희 배낭을 멘 남자가 전철 안으로 들어온다. 배낭이 불룩한 걸 보니 산나물이라도 그 안에 들어 있나보다. 등산화에 먼지가 뽀얀 걸로 봐서 어디 먼 산을 갔다 온 것 같다. 그가 바짓단에서 뭔가를 툭 털어낸다. 전철 바닥에 떨어진 건 마른 검불 몇 개와 손톱만한 까만 벌레다. 어쩌다 이곳까지 온, 털이 송송한 벌레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 벌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눈이 심심하던 차에 볼거리 하나가 생긴 셈이다. 벌레는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고 조금 기어가다가 신발이 지나갈 땐 고개를 움츠리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발밑에서 죽을 것 같은 생과 사의 절박한 기운이 눈앞에서 벌어짓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불상사는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위험을 감..
[좋은수필]업경 / 박흥일 업경 / 박흥일 명부冥府로 출석하라는 전갈이 왔다. 명부란 말만 들어도 다리가 얼어붙지만, 어차피 이승을 이별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에 마음을 다잡아 명부에 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며 명부전의 대청마루에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우락부락한 판관이 사천왕의 눈알을 부라리며 높다란 보좌에 앉아서 흘깃 내려다보았다. 오방색 조끼적삼을 헐렁하게 풀어헤친 판관은 밤낮으로 밀려드는 영혼들을 심판하느라 지쳐보였고, 맥없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판관은 초면 영혼의 심문 매뉴얼에 따라 "어느 골에 사는 뉘신지요. 그리고 무슨 일로 이렇게 서둘러 오셨나요."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나는 악업惡業만 까발려서 얼렁뚱땅하는 판관도 많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판관의 입을 주시하였다. 판관은 판..
[좋은수필]짝 / 최장순 짝 / 최장순 계산대 입구 명함을 집어 들고서야 여인의 이름이 ‘춘화’ 라는 걸 알았다. 버젓한 식당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춘화 씨네 밥집’으로 불렀다. 큰길에서 조금 걸어 들어간 골목 안 실비식당, 꽃무늬 블라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입술 주변에 점 하나 찍은 콧소리가 연상되는 이름이지만 정작 본인은 콧소리를 내지도, 화사하게 꾸미지도 않았다. 적당한 키에 연륜이 묻어나는 튼실한 몸, 입술은 누운 일자로 닫혀 있을 때가 많았다. 무릇 장사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야만 한다지. 저 봉해진 입이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손님 상머리에서 얼쩡거리지 않는 모습이 내심 좋아 보이기도 했다. 막걸리집도 아니고 요릿집도 아닌 골목이 지키는 나름의 자존심이지 싶었다. 이끼 낀 바위처럼 모여 앉..
[좋은수필]네모에 갇히다 / 노혜숙 네모에 갇히다 / 노혜숙 나는 골몰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 끌리고, 빠지고, 갇힌다. 늘 거기 있으나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는 사물들, 어느 순간 그들 속에 갇힌 나를 본다. 눈을 뜨면 시선은 버릇처럼 천장에 가 머문다. 네 귀 반듯한 사각형의 안방 천장. 그만큼 내 삶의 민낯을 속속들이 들여다 본 존재도 없으리라.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고 그 둘이 네 명의 가족을 이루었다가 다시 한 사람이 된 역사를 지켜본 그가 아닌가. 그동안 두 아이는 제 둥지를 찾아 떠났고, 남편은 아내보다 텔레비전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나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중년이 되었다. 천장은 수많은 날 남모르는 나의 뒤척임과 한숨을 낱낱이 꿰고 이을 것이다. 저 케케묵은 과거로부터 끄집어낸 잡념을 미래로 확장해가는 부질없는 버..
[좋은수필]칼 / 장미숙 칼 / 장미숙 칼을 들었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칼이 번쩍, 뜨거운 빛을 뿜는다. 날카로운 날을 쓱, 한번 행주로 닦아준다. 다섯 손가락에 힘을 골고루 실어 칼자루를 잡는다. 칼자루가 손에 착 달라붙는다. 체온을 나눈 지 오래되었다는 뜻일 거다. 믿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친숙함에서 우러나는 편안함이기도 하다. 이젠 칼날을 허공에 놓을 시간이다. 수평으로 허공에 꽂힌 칼날, 냉정하다. 뭔가를 잘라야 할 때의 그 냉철함이 손끝에 전해진다. 칼의 본분은 자르는 것, 남겨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갈은 이지적이다.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리는 일에 익숙한 칼은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오 센티미터 허공에 걸린 긴 칼이 표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 자신이 꽂힐 자리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