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 변하고 있다 / 송연희
옆집이 팔렸다. 새 주인이 집수리 공사를 시작했다. 골조만 남기고 H빔을 박은 뒤에 다 헐어냈다. 집을 샀다는 여자가 과일 한 상자를 들고 왔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여자는 체구가 마르고 작았다. 그녀는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다고 하였다. 나는 공사비가 많이 들겠다고 했고, 그녀는 생각한 것보다 추가 비용이 만만치 한을 거라며 콧잔등을 찡그리고 웃었다.
가림막을 걷어낸 집은 예전의 모습과는 그야말로 딴판이었다. 환골탈태란 바로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오래된 붉은 벽돌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흰 벽과 회색빛의 단조롭고 깔끔한 학원 건물이 탄생했다.
이웃사람들은 주택지 안에 학원이 생겨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학원은 비교적 조용했다. 영국 유학을 했다는 그녀는 이층에서 살림을 하고 일층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나다니면서 보니 시간대 별로 한두 명만 앉혀놓고 수업을 했다. 무슨 특별한 수업을 하는 듯 보였다.
우리 아이들은 이 동네에서 자랐다. 지금은 다 제 둥지로 떠났다. 이곳에서 오래 살다보니 누구보다 골목 사정을 시시콜콜 알고 있다. 돌담집 여자는 꽃을 좋아해서 봄이면 꽃모종을 들고 다닌다. 맞은편 집의 노인은 몇 해째 바깥 거동을 못하고, 뒷집 처녀가 안고 다니는 개는 얼마 전 성대수술을 했다.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회색 대문집 남자는 주차문제로 목소릴 높였고, 가게 할머니는 밤중에만 폐지를 줍고 다닌다.
그런 우리 동네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집 한 채가 헐리면 원룸 건물이 들어서고, 두세 채가 없어지면 빌라가 생긴다. 갓길 집들이 카페로 둔갑을 하고, 빵 굽는 가게가 들어서고, 수제 돈가스집이 간판을 걸었다.
막내딸이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였다. 큰길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주택단지의 원룸에서 자취를 했다. 그때 원룸 주변에 걸려 있던 작은 간판들이 지금 이곳 풍경과 흡사했다. 집과 담 사이의 작은 공간에 수줍은 듯 달려 있던 간판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목 좋고 번듯한 곳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자릿세 때문에, 맞는 조건을 찾다 이런 골목 안까지 온 게 아닐까.
'빵 나오는 시간: 오전 11시.'
비가 찹찹하게 내리는 날 빵가게 앞으로 가봤다. 거짓말처럼 골목 안에 고소한 냄새가 야금야금 번지고 있었다. 머리에 레이스가 달린 동그란 모자를 쓰고,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아가씨가 오븐에서 빵을 꺼냈다. 빵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넛이나 되었다. 아가씨는 금방 나온 빵을 작게 잘라 진열대 앞에 시식용으로 내놓았다. 가게 안엔 작은 콘솔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빵을 조금 뜯어먹다가 집으로 왔다. 어슬렁거리며 부담 없이 들를 곳이 생긴 건 반가운 일이다.
골목은 늘 큰길에 관심이 많다. 스스로 큰길이 될 날을 기다리기도 한다. 나도 한때 큰 길로 나가고 싶었다. 그곳만이 나를 구원하고 지향해야 할 목표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큰길은 좀처럼 내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환하고 넓은 길에서 도리어 길을 잃고 헤맸다. 분수를 모르고 덤비다가 시간만 허비하고, 큰 걸 욕심내다 작은 것까지 잃었다.
요즘 재개발이란 명분으로 오래된 골목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앞서 간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들의 뭉텅 잘려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낡은 담벼락에 남은 희미한 흔적, 작은 창문을 통해 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이의 웃음소리가 밴 골목은 우리의 지난 삶이 녹아 있는 것이다.
오늘은 창문을 열고 무연한 눈으로 골목을 바라본다. 빈집, 빈방이 늘어나는 한낮의 골목엔 고요가 진을 치고, 무료한 돌멩이 사이로 풀꽃들이 피어 있다.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마음을 붙이고 살았을까. 더러는 눈물바람을 일으키며 이 골목을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불쑥 가슴 저릿한 추억을 찾아, 저녁연기처럼 스며들 '그 누군가를' 위하여 가로등은 오늘밤도 골목길을 밝히는 건 아닐까.
골목은 그 존재만으로 위안과 편안함을 준다. 큰길에선 느낄 수 없는 소소한 일상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여인들이 평상에 앉아 나물을 다듬기도 하고, 집배원이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땀을 훔치기도 한다. 양지에서 다리를 쭉 뻗고 잠든 고양이를 볼 때도 있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생각도 느릿느릿 지나가고 거친 숨소리가 어느 결에 고와져 있다. 내가 이곳을 떠나는 날은 한 시절의 애틋한 삶과 함께 내 안의 골목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어느 날, 요양병원 차가 조용히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출입을 못하는 맞은 편 집의 노인이 딸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오른다. 남편을 요양원에 보낸 늙은 아내의 얼굴이 마른 행주를 짜놓은 것 같다. 그 후로 오후만 되면 할머니가 작은 가방을 들고 외출을 한다.
"할아버진 좀 어떠세요?"
한번은 외출하는 할머니를 붙들고 물었다.
"내가 매일 가보기로 약속을 했지. 나도 좀 있다 가야지."
할아버지가 드실 반찬 한두 가지, 주전부리 조금씩을 들고 가는 할머니의 저 모습 또한 이 골목에서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 사이의 인정도 풍경도 시나브로 사라진다.
새끼 밴 고양이가 담장 밑에서 졸고 있다. 오후의 햇살이 녀석의 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이미 익숙한 풍경이 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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