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 (5739)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암갈색에 살다 / 구유화 암갈색에 살다 / 구유화 흰색 찻잔에 담긴 커피는 색깔만으로도 나를 사로잡는다. 조금 떨어져 있어도 그 향기로 나를 잡아끈다. 베란다 창 너머로 오후의 햇살이 아른거리면 누군가 부르는 듯이 색깔보다 진한 향기를 들고 창가에 선다. 나의 독백을 향기에 싣고 때로는 일렁이는 눈물을 암갈색에 담근다.정오를 넘어선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나면 어김없이 밤을 밝히고 만다. 그런 날은 일부러 늦은 시각까지 무엇을 하다 잠을 청해도 정신은 더욱 명료해진다. 유리창에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보면서 초침 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느낄 즈음 째깍거리는 소리는 내 머리를 두드리다 나중에는 가슴까지 때린다. 창밖의 나무가 바람과 어울려 모자 쓰고 지팡이를 짚은 마귀할멈도 만들어냈다가는 금세 국자 모양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럴 때.. [좋은수필]국밥 / 김응숙 국밥 / 김응숙 불을 댕긴다. 자궁처럼 둥글고 깊은 어둠에 섬광이 인다. 아궁이 속이 환해지더니 이내 푸른 꽃잎 같은 불꽃들이 일렁인다. 후끈, 끼쳐오는 열기가 앞으로의 치열한 여정을 예고하는 듯하다.어느덧 만개한 불꽃들은 가마솥의 검은 배를 핥기 시작한다. 푸른 혀뿌리를 들썩이며 붉은 혓바닥을 둥글게 말아 올린다. 가마솥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부드럽지만 가혹한 이 애무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 속에 품은 뼈들을 낱낱이 고아 한 솥 가득 뿌연 정수를 뽑아 올릴 때까지 가마솥을 달구고 또 달굴 것이다. 마치 한 생명을 탄생 시키는 지난한 산통처럼.가마솥은 십 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궁이의 거센 열기를 시종 침묵으로 받아낸 솥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우물처럼 보인다. 시퍼.. [좋은수필]운명의 함수 / 견일영 운명의 함수 / 견일영 내가 운명에 대하여 가장 큰 감동을 받은 때가 중학생 시절, 음악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첫 음으로 나오는 "따따따따아"하는 비장한 소리는 운명이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운명이 무척 무섭게 느껴지면서 평생 그에게 한 번도 도전장을 던져보지 못했다.선생님은 그 곡의 정식 이름이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이라는 것도, 그 곡 속에는 젊은 베토벤의 도전, 거센 숨결, 갈등, 슬픔, 좌절과 그 좌절을 딛고 성숙된 자아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엮여져 있다는 것도, 또 고뇌를 통한 자아확립의 의지와 그 성취에의 기쁨들 그대로 나타냈다는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따따따따도 피아노나 음향 기기로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입으.. [좋은수필]부적 / 정성화 부적 / 정성화 그날도 비가 내렸었다. 가계부를 펴놓고 한 주간 쓴 생활비와 영수증을 맞춰보는데 계산이 맞지 않았다. 남편의 월급 중 삼십만 원만 생활비로 남겨두고는 무조건 저축하고 있던 자린고비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디에 썼는지 알 수 없는 돈이 만 원이나 되었다. 십 원 단위까지 메모하고 영수증까지 꼬박꼬박 챙겨두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그때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들이치는 비 때문인지 어머니의 한쪽 어깨가 젖어 있었다. 나는 조금 전의 기분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수건으로 젖은 옷을 닦고 계신 어머니께 그 돈 만 원 얘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그날따라 칼국수만 한 그릇 드시고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신발을 신기 전에 뭔가 얘기를 할 듯하다가 그만두는 듯했다.나는 어머니께 드리려고 차비 이만 원을.. [좋은수필]흙을 밟고 싶다 / 문정희 흙을 밟고 싶다 / 문정희 동네 꼬마들이 흙장난을 하고 있다. 그것도 흙냄새가 향기로운 아파트 정원에 앉아서."출입금지"라는 팻말에도 아랑곳없이 흙 위에 풀석 주저앉아 노는 모습이 좋은 놀이터라도 발견한 듯 신이 나 있는 표정이다. 화단 내에 들어가지 말 것을 주의를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심으로 돌아가 모르는 척 그들 노는 모습을 망연자실 지켜보고 있다. 아파트 내에서 그나마 흙냄새나는 곳이 있다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곱슬머리 남자아이가 운동화를 벗더니 신발 가득 흙을 담기 시작했다. 짐 실을 트럭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뒤질세라 그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는 무엇을 하려는지 흙을 산더미처럼 쌓기 시작한다. 흙을 갖고 온갖 놀이를 구상하는 모습이 어찌나.. [좋은수필]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가끔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멸치를 깐다. 멸치볶음을 좋아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다. 목마른 짐승 샘물 찾는 격이라고나 할까. 멸치를 까는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한 마리당 세 단계로 작업은 종료된다. 먼저 대가리를 딴 다음 엄지손톱으로 등을 가른다. 그다음에 내장을 들어낸다. 그래야만 깔끔하게 끝난다. 내장이 뱃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 부분을 뒤적거리다가는 낭패를 본다. 잘 갈라지지도 않지만 제일 맛있는 부분이 부스러지기 때문이다.멸치를 까다 보면 잠시 마음이 짠할 때가 있다. 어느 한 놈도 내장이 까맣게 타지 않은 것이 없어서이다.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저 지경이 되었을까 싶다. 짠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편안히 죽은 놈은 한 마리도 없다. 모두 뒤틀려 있다. 끓는 물.. [좋은수필]찰(察) / 김은주 찰(察) / 김은주 잠잠하던 배롱나무 가지가 잠시 출렁인다. 홍두깨 산 중간 봉우리로 떠오른 햇살은 아직 마당의 반도 지나지 않았다. 적막한 아침 기운을 흔드는 이가 누군가 보니 곤줄박이다. 흔들리는 배롱나무 가지에서 음音을 타나 싶더니 잠시도 한곳에 있지 못하고 다시 살구나무로 옮겨간다.살구나무 이파리에 몸을 숨긴 곤줄박이는 눈 깜짝할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디로 갔나? 고개를 빼 살피는 동안 수련 담긴 돌구유로 날아가 날개를 적신다. 젖은 날개로 얼굴 두어 번 훔치고 다시 자박자박 구유 주위를 맴돈다. 마른 구유 주위로 젖은 곤줄박이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다. 물속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구유 속으로 풍덩 몸을 담근다.때아닌 불청객에 좁은 구유 안의 수련은 잎을 흔들며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좋은수필]비교, 그 인정머리 없는 것에 대하여 / 정성화 비교, 그 인정머리 없는 것에 대하여 / 정성화 중학교 때 같은 반에 특별한 친구가 있었다. 공부뿐 아니라 독서량이나 문학적 재능, 예술적 소질까지 탁월한 '별종'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기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친구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그저 한번 훑어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도 다 이해되고 외워지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한 시간에 한 바퀴를 쉴 새 없이 뛰어야 하는 분침分針이었다면, 그 친구는 한 시간에 한 칸만 옮겨가는 시침時針이었다. 그 친구에 대한 내 마음은 수시로 색이 변하는 수국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질투심으로, 다음에는 부러움과 놀라움으로, 마지막엔 절망감에 젖은 채 그 친구를 보게 되었다.아무리 애를 써도 그 친구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제 거의 .. 이전 1 2 3 4 5 6 ··· 7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