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 (5740)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말가웃지기 / 석현수 말가웃지기 / 석현수 스무 해가 넘어 찾아본 논은 정글이 되어 있었다. 오직 문서 하나만 쥐고 있다가 퇴직 후 내 땅이라며 들여다보는 곳이니 논의 경계선조차도 가물가물하다. 가뜩이나 좁은 다랑논을 인접한 이들이 산소를 넓힌다고 떼어가고, 경운기가 다니게 길을 넓힌다며 잘라먹었으니 작은 땅이 더 작아졌다. 긴 세월 주인 없이 방치된 곳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처지다. 부모님은 이 논을 말가웃지기라고 불러왔다. 나는 이 말의 뜻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늦었지만 내가 말가웃지기를 억지로라도 추론해 봐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 논의 내력은커녕 순수 우리말조차도 고어가 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말가웃' 이란 말이 남부 지방에서는 한 말반의 볍씨를 뿌릴 정도의 넓이라는 뜻으.. [좋은수필]갱시기 / 정성화 갱시기 / 정성화 길을 가다가 키가 아담하고 머리를 짧게 자른 어르신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살아계셨더라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런 날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갱시기’다. 아버지가 즐겨 드셨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잡숫고 싶어 했던 음식이다.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전쟁 중의 어느 날, 식수를 얻으러 민가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 집 안주인이 한 그릇 먹고 가라며 내어준 음식이 갱시기였다. 그날 얼마나 맛있게 드셨던지 평생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갱시기는 경상도 내륙 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멸치 육수에다 김치와 찬밥을 넣고 푹 끊인 것으로, 국보다는 걸쭉하고 죽보다는 묽다. 우리나라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의 경계에서 생겨난 음식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상품화되지 못해서 이 .. [좋은수필]시간혁명 속에서 / 정목일 시간혁명 속에서 / 정목일 소리 없는 혁명이 진행 중이다. 인간은 시간혁명 속에 살고 있다.세계 어느 곳이든지 3초 안에 무료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전자우편의 위력과 시· 공간의 장벽을 허물어버린 인터넷, 어느 곳이든 통화가 가능한 휴대폰 등이 시간혁명을 몰고 온 첨병들이다.시간을 얼마나 앞당기느냐가 생존경쟁의 관건이다. 이제 속도와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대를 지배하는 의식이 되었다.우리나라에 시간혁명의 전환점을 이룬 것은 고속철도의 개통이다. 고속철도를 타면 터널을 지나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풍경을 감상한다든지 사색에 잠기는 여유는 사라졌다. 산수 경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여행한다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게 됐다. 시간혁명은 지역이라는 공간 개념을 없애고 삶을 시간 개념 속에 포함시켜 놓는다.. [좋은수필]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 이인주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 이인주 종일 그림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다.빛바랜 고풍의 비단이 오래 머금었다 내뿜는 잔광처럼 은은히 살아오는 한 폭의 풍경. 고즈넉한 그 풍경 속으로 나는 어느덧 먼 고대의 땅을 들어선 삿갓 쓴 방랑자처럼 몰아의 한 초점이 되어 빨려 들어간다.하늘하늘 미풍에 흩날리는 버들가지 아래 백마가 놓여 있다. 기실 버드나무에 매여 있지만 그냥 놓여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만큼 백마는 기품 있고 당당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먼 허공을 보는 것도 같고 생각에 깊이 잠긴 것도 같다. 짐승에게서 품격을 발견하는 눈을 가진 한 선비의 고고한 인품이 말없이 스며오는 순간이다. 이때 말(馬)은 이미 말이 아니며 만 가지 상징이 담긴 무언의 말이기도 하다.버들가지는 바람에 나부끼는 그.. [좋은수필]금 긋기와 담 쌓기 / 민명자 금 긋기와 담 쌓기 / 민명자 최악의 폭설이다. 세상은 온통 하얀 적요에 잠겨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기상이변을 떠들고, 모처럼 방문 예정이던 지인은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대지 모신 가이아의 노함인가. 눈의 반란에 인간들은 속수무책이다. 창밖의 나무들은 참선수행을 하듯 미동도 하지 않고 온몸으로 눈의 무게를 감당하고 서 있다.때로 낭만적 대상이기도 했던 눈이나 비는 폭설과 폭우로 바뀌면서 생태환경의 위기와 직결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예지는 작금의 현상을 어떻게 볼까. '생태 시 모음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집을 펼쳐본다. 오세영 시인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 (연인M&B, 2010)이다. '푸른 스커트'를 입은 대지는 모성의 손길로 만물을 생육한다. 그러나 그 스커트의 '지퍼' 안에 감추어진 부드.. [좋은수필]그림자 액자 / 최장순 그림자 액자 / 최장순 어떤 풍경이 가을 벽에 오롯이 걸려 있을까. 강변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조성되어 있는 '물의 정원'을 향한다. 호수이듯 늪이듯, 멀리 운길산이 한 아름 품고 있는 정원엔 올망졸망한 꽃들이 주변을 지키고, 나비와 벌과 온갖 풀벌레 소리를 불러들일 것이다. 나무 그늘 밑 벤치는 반가운 벗을 기다리듯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시선을 넓히면 흐릿한 낙타 등 같은 완만한 산이 제 얼굴을 말간 수면에 비춰보는 북한강, 보이지 않는 물갈퀴로 고요한 수면에 길을 내고 지나가는 물새들이 보인다. 조용하던 물살이 잠시 흔들렸다가 잠잠해진다.물의 정원을 자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액자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내 마음대로 액자.' 언제부턴가 나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좋은수필]老木을 우러러보며 / 한흑구 老木을 우러러보며 / 한흑구 나는 오늘 보경사寶鏡寺 앞뜰에 앉아서 하늘 높이 솟아오른 느티나무 노목 하나를 쳐다본다.오백 년이나 넘어 살았다는 이 노목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모르는 듯이 상하좌우로 확 퍼져 올라섰다.그러나, 지금 이 노목은 검푸른 그늘을 새파란 잔디 위에 드리우고 있지만, 그 다섯 세기의 길고 오랜 세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넓은 허공에 조그마한 한 점의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스럽기도 하다. 한때, 큰 번개에 맞아서 찢어졌다는 큰 가지 하나가 떨어져 나간 부분에는 크고 기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이 늙은 나무속에는 얼마나 많은 구멍들이 아래위로 뚫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에도 큰 구렁이들이 얼마든지 드나들기에 충분하다.구렁이들이 살지 않는다.. [좋은수필]땅거미 / 허세욱 땅거미 / 허세욱 지난겨울, 상하이 어느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있었다. 덥석 오케이를 했다. 속내는 따로 있었다. 그 김에 노‧장(老‧莊)의 고향엘 들리고파서였다. 그런데 그 길이 만만치 않았다. 상하이에서 노자의 고향 루이까지 8백여 킬로 길인데다 설날이 가까워서인지 도시 표를 살 수 없었다. 마침내 입석표 한 장을 거머쥐었지만 열두 시간 완행열차를 콩나물시루로 갈 수 없어 망설이다가 졸업생 하나의 호의로 길을 나섰다.루이를 반환점으로 귀로에 올랐다. 장자의 고향으로 알려진 안후이성 멍쳥을 들려서 최근 낙성했다는 장자의 사당을 보았다. 다시 멍쳥 북쪽을 스치는 궈강 나루터에는 2천3백여 년 전 장자가 농장 관리식, 곧 치웬리를 지냈다는 현장 그 어느 흙 두덩이에 작은 그루터기 하나쯤 눈곱처럼 붙어있.. 이전 1 2 3 4 5 6 7 8 ··· 7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