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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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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마음에 주는 글 / 정목일 마음에 주는 글 / 정목일  나는 마음에 드는 글을 써보고 싶다. 글쓰기는 마음과의 대화가 아닐까. 마음은 나와 동일체이지만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가 편안하고 행복하여야 마음도 그러하다. 어떨 때는 마음과 내가 동떨어진 사이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이방인처럼 여겨진다.글쓰기는 독자에게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바람일 수 있지만, 먼저 마음과의 소통을 원한다. 마음에 묻은 집착, 이기려는 때와 분노, 억울함, 수치 같은 얼룩, 어리석음이라는 먼지를 어떻게 씻어내고 닦아낼 수 있을까.마음속에 샘을 하나 파두어서 마음을 청결히 닦아낼 수 있을까. 마음의 샘가에 향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싶다. 글쓰기는 마음을 닦아내어 편안을 되찾고 맑은 샘물을 솟아나게 하는 일이다​.지식과 정보보다 체험과 자연..
[좋은수필]굴비 / 임만빈 굴비 / 임만빈  굴비는 굽는 냄새를 풍기면서 먹어야 제격이다. 연기 속에 숨어있는 생선 굽는 비릿한 냄새가 에피타이저(appetizer)처럼 식욕을 돋운다. 변변한 반찬이 없던 시절, 굴비 하나를 구워 온 집안 식구들이 밥을 해치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집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 굴비를 굽는 냄새가 온 집안을 채워도 옆집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다.지금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다르다.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고 굴비의 참맛을 즐기기가 힘들어졌다. 아무리 환기를 잘해도 굴비 굽는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고 위층과 아래층으로 번지곤 한다. 이웃들은 비릿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린다. 특히 서양 음식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그런 냄새를 싫어한다. 굴비 구운 냄새가 몸에 배면 학교에서도 놀림 받기가 십상이다.어머니가 도시생..
[좋은수필]눈 내린 날의 모노로그 / 최민자 서울 적설량 25.8센티. 107년 만의 폭설, 기상 관측 이래 최고의 눈이래요.차들은 아예 멈추어 섰고 구청에서도 눈 치우기를 포기한 것 같아요. 한 나절 내린 눈으로 도시가 이렇게 마비되어 버리다니. 눈은 그 순백의 언어로 길의 주인이 차가 아니듯,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고 고요하게 일깨워 주네요. 눈 쌓인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가 생각나 냉큼 찾아 읽어 보았지요. 오오, 눈부신 고립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정말 그렇게 내 책임이 아닌 다른 핑계나 불가피성으로 삶의 알리바이를 둘러댈 수 있다면, 하는 상상에 설레어보다가 치과 약속 때문에 서둘러 중무장을 하고 나왔지요. 이웃 아파트 상가까지 이십분쯤 걸어가야 하는 길, 눈이..
[좋은수필]못 뽑기 / 정경아 못 뽑기 / 정경아  섬뜩하다. 예리한 무엇에 찔린 듯 온몸의 촉수가 살아난다. 아궁이의 재를 퍼내다 말고 나도 모르게 멈칫, 손을 멈추었다. 웬 못이 이리도 많은가. 시뻘겋게 녹이 난 것, 구부러진 것, 두 동강이 난 것, 대가리가 떨어져 나간 것 등이 재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아궁이의 재를 퍼다 부추밭에 뿌려 주려 했는데 이대로는 거름으로 쓸 수도 없겠다. 생각해 보니 집을 짓고 남은 폐목으로 군불을 지핀 결과이다. 못을 뽑아내는 것이 귀찮고 성가셔서 그냥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무는 타서 못이 박혔던 흔적조차 없이 재가 되었는데 타지도 못한 못만 뎅그러니 재 속에 남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못을 가려내지 않고는 재를 함부로 퍼다 버릴 수도 없겠다. 밭에 뿌릴 수는 더욱 없다. 지난여름..
[좋은수필]문 / 최장순 문 / 최장순  강이 꽝꽝 얼어 있다. 누군가 던져놓은 돌을 껴안은 채 실금도 미동도 없는 저 강은 지금, 두 손을 깍지 낀 단호함이다. 제아무리 문고리를 잡아 흔들어도 기척이 없는 닫힌 문이다.문은 소통이다. 걸음이 들고 나는 속에서 정이 오가고 말이 통한다. 살짝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는 안과 내다보는 바깥은 은밀하게 통한다. 문이 없다면 벽을 허물거나 월담을 해야 한다. 월담은 불미스런 소문이 담을 넘으니 불법, 문은 정정당당한 통과의례가 아닌가.문은 신분이다. 구중궁궐 왕이 지나는 문이 있었고, 나인들이 드나드는 뒷문도 있었다. 성곽의 후미진 곳에는 시체가 들고나는 시구문이 있었다. 솟을대문과 사립문, 형식적인 싸리문은 모두 신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대문은 집 안팎을 구분하지만 방 안팎을 경계 짓..
[좋은수필]내버려 둠에 대하여 / 최원현 내버려 둠에 대하여 / 최원현  한 달여를 아주 심하게 앓았다. 대학병원의 응급실로도 들어가고, 진통제를 먹어보고 주사를 맞아 봐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은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 한 폭을 떠오르게 했다. 기억 속의 그림은 빨강과 검정의 소용돌이였다. 보고만 있어도 극도의 혼돈과 불안을 느끼게 하는,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이번 내 상황은 세탁기의 탈수통 속에서 돌아가는 빨래마냥 그 그림 속 휘돌이 속으로 온몸이 아닌 머리만 빨려 들어가는 고통이었다.앓는다는 것, 거기엔 분명 원인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통증은 극에 달하는데도 현대 과학 첨단 장비의 대답은 '이상 없음'이요 '아주 정상임'일 때 그것을 인간 능력의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장비적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 '..
[좋은수필]어머니를 위한 여섯 개의 은유 / 이어령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개의 은유 / 이어령  어머니와 책나의 서재에는 수천 수만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이다.이 한 군의 책, 원형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이 나의 어머니다. 그것은 비유로서의 책이 아니다. 실제로 활자가 찍히고 손에 들어 펴볼 수도 있고 읽고 나면 책꽂이에 꽂아둘 수도 있는 그런 책이다.나는 글자를 알기도 전에 책을 먼저 알았다. 어머니는 내가 잠들기 전 늘 머리맡에서 책을 읽고 계셨고 어느 책들은 소리 내어 읽어주시기도 했다.특히 감기에 걸려 신열이 높아지는 그런 시간에 어머니는 소설책을 읽어주신다. 나는 아련한 한약 냄새 속에서 《암굴왕》·​《무쇠탈》·《흙두건》, 그리고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다.겨울에는 ..
[좋은수필]개똥벌레의 추억 / 이어령 개똥벌레의 추억 / 이어령  한적하던 길이 갑자기 몰려든 자동차들로 붐빈다. '인산인해'人山人海가 아니라 '차산차해'車山車海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짜증을 냈지만 정보에 밝은 M교수가 반딧불이 감상회가 열린 것이라고 알려준다. 아침마다 산책하는 연구소 뒷산 오에야마大枝山가 바로 반딧불이의 서식지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미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반딧불이를 이곳 연구소 바로 뒷산에서 보게 되다니…. 정말 한여름 밤의 꿈이다.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M·L교수와 함께 반딧불이 구경을 나선다. 야조野鳥 유원지라고 써 붙인 산길 입구에는 '반딧불이 감상회'라는 낯선 간판이 들어서고 텐트가 쳐져 있다. 우비 차림 도우미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는다. "사진 촬영은 하지 마세요. 반딧불이가 놀란답니다."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