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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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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두부과자 / 김지희 두부과자 / 김지희 전통찻집에서 보이 차에 곁다리로 두부과자가 나왔다. 군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내게 그날만큼 두부과자는 구원군이었다. 정사각형의 하얀 옷에 작은 이모티콘 눈웃음을 닮은 구멍들, 바삭바삭했다. 주인장 눈치 없이 바지런히도 만지작거렸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후에 만난 친구와의 어색한 자리에 뚜쟁이가 되어주었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더듬어 생각해도 아슴푸레하다. 두부과자의 매무새만, 눈으로 먹고, 손으로 먹고, 입으로 먹었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두부과자에 약이라도 넣었는지 심장의 쿵쾅대난 소리가 머리를 울리고 귀에까지 들렸다.의미 없는 이런저런 인사말들이 오가고, 알고 싶지 않은 일상 안부들은 귓등으로 흘리며 눈은 두부과자에만 주고 있었다. 오래전 기억들은 내내 목구멍에 막혀 ..
[좋은수필]풋울음 잡기 / 노혜숙 풋울음 잡기 / 노혜숙 온몸에 맷자국이 흡사 꽃처럼 흐드러지다. 나자마자 메로 맞고 담금질 당한 신세 같지 않게 기품이 있다. 세상에 무슨 팔자가 평생 두들겨 맞으며 노래를 불러야 한단 말이냐. 그렇게 터득한 득음 덕일까. 제대로 곰삭은 징의 울음이 깊은 골을 휘돌아 나오는 바람 소리 같다.시작부터 너무 꼼꼼하게 살피는 바람에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세 시간째 혹사당한 눈이 슬슬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이벤트가 열리고 있는 민속박물관 3층의 전시물 관람은 건성이었다. 대강대강 목례만 건넨 채 마무리를 서두르고 있는데 홀연 생뚱맞은 이름 하나가 발목을 붙들어 세웠다. '풋울음 잡기'. 그 뒤로는 징이 적잖은 세월의 무게를 내려놓고 좌정해 있었다. 그와 더불어 한 시절을 풍미했을 징채도..
[좋은수필]싸리꽃 눈물 / 안귀순 싸리꽃 눈물 / 안귀순 숲은 회색빛 커튼을 드리우고 깊은 묵상에 잠겨 있다.운문재 계곡에서 밤을 새우고 첫새벽 뽀얀 안갯속을 더듬어 가지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하절기엔 아침마다 안개비가 내린다는 신비의 명산, 촉촉한 서정으로 빛나는 검푸른 잎새들 사이로 너울너울 춤추는 생성의 기운, 하늘, 땅, 나무와 사람이 한 덩이 운해雲海에 실려 둥둥 떠내려갈 것만 같다.오늘은 쌀 바위로 오르는 숲이 짙은 길을 택했다. 며칠 전 폭우가 할퀴고 간 탓인지 여기저기 무너진 산사태로 응달진 계곡은 양지가 되고, 볕 좋은 양지는 뭉텅 살점이 달아나 앙상한 뼈대가 드러난다. 어둠 속에 웅크린 세월 한 자락 질겅질겅 밟고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마음속으로 중얼대며.늙은 상수리나무숲을 따라 가파른 고개 하나를 넘어..
[좋은수필]바람의 맛 / 유경환 바람의 맛 / 유경환 그곳의 바람은 다르다. 바람의 맛이 다르다. 햇볕의 결이 다르다. 그곳은 원미산 기슭 내 사는 곳이다.20여 년 전 경인전철이 개통되었을 적에 그곳으로 나갔다. 이른바 서울 탈출이다. 뻘건 진흙이 벗겨진 산의 생살이듯 군데군데 드러나 있는 산비탈의 체비지 몇 평을 샀다.나의 숲 그늘의 안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평당 기천 원씩의 투자는 효과가 있어서 정서적 안정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친구의 도움으로 집을 올릴 수 있었다. 자그마한 2층 집.뜨락은 넉넉히 잡았다. 담을 둘러 안마당으로 삼고 잔디를 깔고 담 밑엔 돌을 이리저리 놓고 그 사이사이엔 꽃과 풀을 꽂았다.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늘 푸른 나무들도 심었다. 삼 년이 지나자 뜨락이 아늑해졌다. 한창 초록이 ..
[좋은수필]빛나지 않은 빛 / 반숙자 빛나지 않은 빛 / 반숙자 거실 벽에 액자 한 틀이 걸려 있다. 비록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나는 이 작품에 어떤 예술 작품 못지않은 의미를 둔다.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들이 액자에 있는 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가 있다. 아마도 글의 뜻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쉽게 이해하지를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액자에는 하얀 여백에 眞光 不煇(진광 불휘)라는 글씨가 두 줄 종으로 쓰여 있고 줄을 바꿔 賀 上梓(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상재를 축하하며)라는 글씨가 역시 두 줄로 있다. 다음은 여백을 넉넉히 두고 대나무를 그렸고 아래는 1986년 처서 절이라 쓰여 있다. 처음과 끝부분에 낙관을 찍었다.15년 전의 이야기다. 첫 수필집을 출간하고 분에 넘치는 격려를 받았다. 특히 출판을 맡아주신 출판사 사장님..
[좋은수필]여름 제사 / 은유 여름 제사 / 은유 시적인 게 뭐예요? 시 수업에서 질문이 나왔다. 난 오래된 시집에서 본 설명에 기댔다. "그 시적인 것은 뭐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고, 딱히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선적인 것과 닿아 있는지 모르겠다,"(황지우, , 64쪽) 그리고 예를 들었다. '여름 제사' 같은 게 아닐까요?저 오늘 여름 제사 지내러 가요. 얼마 전 지인이 지나가듯 하는 말에 몸이 움찔했다. 여름 피서가 아니라 여름 제사. 이 빗나가고 거스르는 말들의 배열이 내겐 너무 시적으로 다가왔다. 삼복더위에 호화로운 휴가 한번 즐기지 못한 엄마는, 자식들 콩국수 만들어 먹이고 아버지 술안주로 부침개 부치느라 가스불 앞을 떠나지 못하고 낑낑대던 엄마는 한여름에 돌아가셨다. 써보지 못한 여권 사진이 영정사진이 됐..
[수필]확증 편향確證偏向 / 신현식 확증 편향確證偏向 / 신현식 사경死境을 헤매었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게 그런 걸까.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몸부림치려 했지만 사지가 묶여 꼼짝할 수도 없었다. 배를 가르고 여러 장기를 도려내었으니 어찌 아프지 않았을까.재작년에도 이 병원에 왔었다. 역시 상복부 통증 때문이었다. 그때는 담낭 절제 수술을 받았다. 깨끗하게 해결된 줄 알았다.반년쯤 지나 국민 건강검진을 받았다. 위장 촬영을 하며 수술했던 부위를 심하게 눌렀다. 왜 그렇게 누르느냐고 했더니 ‘십이지장게실’이 의심되는 때문이라 했다.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최종 소견에서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촬영 기사가 누른 탓인지 그 부위에 약하나마 통증이 느껴졌다. 꺼림칙하여 동네 병원 주치의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십이지장게..
[좋은수필]복숭아씨 / 박혜자 복숭아씨 / 박혜자 과일가게 주인이 맛 보라며 복숭아 한쪽을 준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 단 냄새를 물씬 풍기던 복숭아는 살을 다 발라내자 씨만 남았다. 주인이 복숭아씨를 휴지통에 던지고는 복숭아 한 개를 또 깎는다. 복숭아씨가 맨몸으로 휴지통에 웅크리고 있다.평생 땅 한 뙈기 가져 본 적이 없는 아버지 이름으로 땅이 생겼다.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산 아래의 천수답이었다. 천수답이 생긴 후로 아버지는 더욱 일에 매달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농작물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가는데 아버지의 몸은 마른 장작처럼 말라갔다.복숭아 알이 주먹만큼 커지고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던 날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터널 앞에서 내린다는 것을 그만 터널을 지나서 내리고 말았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