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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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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청빈의 향기 / 법정 청빈의 향기 / 법정   겨울 산에서는 설화雪花가 볼 만하다. 바람기 없이 소복소복 내린 눈이, 빈 가지만 남은 나무에 쌓여 황홀한 눈꽃을 피운다. 눈이 아니라도 안개가 피어오른 자리에는 차가운 기온 때문에 가지마다 그대로 얼어붙어 환상적인 눈꽃을 피운다. 마치 은은한 달빛에 만발한 벚꽃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생겨난 설화를 보고 있으면 텅 빈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빈 가지이기에 거기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잎이 달린 상록수에서 그런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이미 매달려 있는 것들이 있어 더 보탤 것이 없기 때문이다.내 도반인 그는 맑음을 만들어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생활공간인 방에 들어가 보면, 아무것도 걸리지 ..
[좋은수필]옹이 / 권예란 옹이 / 권예란  겨울이 되니 배롱나무 한 그루가 미끈한 속살을 드러낸다. 나무는 제가 가진 것을 다 떨어뜨리고 나서야 고스란히 본 모습을 내보인다.배롱나무의 짙은 분홍색 꽃은 초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다, 그 분홍색 꽃들이 올망졸망 피면 아담한 키의 여자아이들이 머리에 꽃을 달고 서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지난여름 창문으로 보이는 화사한 꽃들은 나에게 늘 환한 미소를 보내왔다. 그러나 이젠 가진 것들을 다 버리고 나무만 멀뚱히 서 있다. 메마른 가지에는 빈 열매껍질만이 달려 있다. 말라버린 껍질조차 무겁게 느껴질 만큼 가느다란 가지들이다.그 연약한 가지들에 많은 꽃송이와 열매를 품고 살았으니 대견하다. 그동안 꽃만 바라볼 줄 알았지 다른 것에는 무심했다. 배롱나무의 줄기에 작은 옹이들이 박혀 있는..
[좋은수필]시금치 판 돈 / 신숙자 시금치 판 돈 / 신숙자  서랍에 묵혀 두었던 돈을 꺼내본다. 어머니의 흙냄새가 난다. 구십이만 원, 백만 원을 채우려다 기어코 다 채우지 못했다며 내 손에 쥐여 주고 간 어머니의 돈이다.이 돈이 서랍 속에서 잠든 지 삼 년째 접어들고 있다. 시골 노인네가 시금치를 팔아 이 만 한 돈을 마련하기란 농부의 딸이 아니었다면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몇 만 원이 아쉬운 시골인데, 팔순 노인네의 모지락스러움이 떠올라 울컥 눈물이 솟구친다.그해 겨울, 나는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혹한에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살기 위한 치료인지 주검을 부르는 치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항암치료에 고통스러울 때, 어디서 딸의 소식을 들었는지 어머니가 오셨다. 애달픈 사랑꾼을 보고도 만신창이가 된 나는 희망 없는 천정만을 바라보며 덤덤..
[좋은수필]덤 / 이재은 덤 / 이재은  겨울은 기별도 없이 오고 있었다. 겹겹의 푸른빛으로 빛나던 하늘도, 햇솜처럼 닿아주느라 분주하던 햇볕도 어느새 창백하리만치 투명하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손끝까지 저리게 하는 이른 된바람이 떠나는 가을을 절감하게 한다.아무리 손끝을 감싸 쥐고 주물러 보아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손끝뿐인데 온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이럴 땐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알차고 뜨거운 부피로 온몸을 일어나게 해 줄 것이 필요하다. 진한 생강 향을 떠올렸다. 비스듬히 비추던 햇볕이 금방이라도 누워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생강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음만큼 조급해졌다.소란함이 들끓어 편안함이 우러나는 곳이 시장이다. 골라 골라, 싸다 싸, 구경은 거저, 맛없으면 공짜 소리..
[좋은수필]그 여인의 눈빛 / 이정림 그 여인의 눈빛 / 이정림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내 생에서 그렇게 많이 내리는 눈은 처음 본 것 같았다. 어렸을 때 가설무대에서 하는 연극을 본 일이 있었는데, 눈을 내리게 하는 소품 담당자가 졸다가 그만 바구니를 밑으로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 그해 겨울은 마치 하늘의 어느 분이 실수로 두고두고 내릴 눈을 한꺼번에 떨어뜨리는 것처럼 연일 폭설이 내렸다.50대의 나는 뜨뜻한 방 안에서 겨울을 보내기에는 젊어서, 문우 몇 사람과 함께 설악산으로 갔다. 첫날 오후, 우리는 숙소에다 짐을 부리자마자 신흥사로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 생각나는 것은 천년 고찰의 웅장한 모습이 아니라, 무릎까지 푹푹 쌓이는 눈을 헤치며 간신히 걸어 내려왔다는 것이다.​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만..
[좋은수필]사람 소리 / 함민복 사람 소리 / 함민복  눈이 내렸다. 사람 발자국을 간신히 남길 정도의 자국눈이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눈이 와도 빗자루 들고 눈 치울 마당도 없이 살고 있다니. 참 한심한 시골살이다. 새벽 이웃집에서 눈을 치우는 비질 소리와 넉가래 미는 소리는 차고 맑게 들리지 않았던가.그 소리가 들리면, '또 눈님이 오셨군.' 혼잣말을 하며 잠을 개켜 유리창에 올려놓던 그리운 옛집, 눈 내린 새벽 장갑과 모자를 준비하고 마당으로 나가 찬 공기부터 한 큰 숨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서 개집 지붕을 쓸어주었다. 난데없는 사방 은세계에 어리둥절한 똥개의 눈빛, '야, 길상아, 너는 핵 개니까 눈을 잘 모르겠구나. 이게 눈이라는 것이다.' 세월을 조금 더 살았다고 잘난 척을 하며 눈을 가르쳐 주었었지. 그러다가 집 뒤 ..
[좋은수필]숨 / 노경자 숨 / 노경자  자박자박 어둠이 몰려온 산골마을은 정적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당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짙은 청잣빛을 띄며 가늘게 빛나는 수많은 싸라기 별들을 품고 있다. 밤이슬에 맴돌던 공기는 식도를 타고 폐 속으로 전진한다. 싸한 박하 향기가 다시 입으로 통해 돌아 나온다. 하얀 입김들은 지붕 위로 점점이 사라져 간다.그녀의 집 옆으로 작은 도랑이 나 있다. 오랜 가뭄 탓인지 소리 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다 멈추듯, 멈추듯 흘러가는 도랑에 초승달 하나가 갇혀 있다.오후 늦게 찾아온 그녀의 집은 텅 빈 마당을 휑한 바람이 쓸고 있다. 집 곳곳에는 그녀의 손 때 묻은 살림살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어디에 갔을까?"나는 대문도 없는 집을 나와 신작로를 걷는다. 이 길을 사시랑이 된 몸으로 혼자 ..
[좋은수필]말가웃지기 / 석현수 말가웃지기 / 석현수  스무 해가 넘어 찾아본 논은 정글이 되어 있었다. 오직 문서 하나만 쥐고 있다가 퇴직 후 내 땅이라며 들여다보는 곳이니 논의 경계선조차도 가물가물하다. 가뜩이나 좁은 다랑논을 인접한 이들이 산소를 넓힌다고 떼어가고, 경운기가 다니게 길을 넓힌다며 잘라먹었으니 작은 땅이 더 작아졌다. 긴 세월 주인 없이 방치된 곳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처지다. 부모님은 이 논을 말가웃지기라고 불러왔다. 나는 이 말의 뜻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늦었지만 내가 말가웃지기를 억지로라도 추론해 봐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 논의 내력은커녕 순수 우리말조차도 고어가 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말가웃' 이란 말이 남부 지방에서는 한 말반의 볍씨를 뿌릴 정도의 넓이라는 뜻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