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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著者가 되고 나서 알게 된 것들 / 강헌

著者가 되고 나서 알게 된 것들 / 강헌

 

 

글로 밥 얻어먹고 산 지 사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난해 여름, 쉰 중반에 다다른 나는 처음으로 '저자'가 되었다. 영원히 내 이름을 박은 책을 펴내지 못할 줄 알았기에 막상 책이 제본되어 나왔을 때 조금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하고 연재한 것만 모아도 다섯 권은 내도 벌써 냈겠다고 한심해하던 지인들 얼굴이 하나둘씩 차례로 떠올랐다.

첨단의 멀티미디어 시대에 사양산업이나 다름없는 책 한 권, 그것도 베스트셀러 차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음악 책 한 권 간신히 펴내면서 이 무슨 호들갑이람. 하지만 이 작은 책의 출판 하나에 짧지도 길지도 않은 내 삶 전체의 본성이 요약되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약력에도 썼듯이 내 삶은 '산만'과 '의지박약'으로 점철되었다. 나는 도대체 한 군데 진득하게 붙어 있지 못했다. 지금은 마시지 않지만 한창 술 마실 때는 하루 저녁에 예닐곱 술집과 밥집을 전전해야 직성이 풀렸다. 나와 가족의 생계를 주로 담당했던 짧은 원고야 그때그때 미봉책으로 돌려 막을 수 있었지만 200자 원고지로 1000장 넘는 글이 필요한 책 집필은 그런 황폐한 꼼수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가 황석영이 말했듯이 책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다. 나에겐 그런 진득한 엉덩이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발표한 쪽글을 모아 책으로 내는 것은 책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다양한 출판사와 맺은 숱한 계약서는 휴지가 되었고 나는 '저자'가 되기를 자연스럽게 포기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요즘의 내 주된 관심사인 명리학 관점에서는 인성(印性)에 해당한다. 인성이란 글자 그대로 도장을 찍는다는 뜻으로,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지속적 사유와 통찰을 의미한다. 곧 학문과 종교적 신심을 가리키는 요소인데, 내 사주엔 인성이 없다. 그래서인지 종교와도 거리가 멀고, 대학에서 가르쳐도 학문이 내 직업이 되지 못한다. 내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터널을 지날 때 명리학을 독학하면서 내가 왜 글을 쓰되 책은 내지 못하는지, 하나를 마무리하는 인내심은 약에 쓰려 해도 없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 인(人), 이 글자의 형상이 의미하듯이 사람은 자기 홀로 삶을 구성하지 않는다. 어느 한 사람은 수많은 사람과 맺은 관계의 산물이다. 내가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으로 어떤 출판 편집자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요한 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감이 가까워지자 이 편집자는 아예 내 집에 들이닥쳐 대인 밀착 방어를 펼쳤다. 그 기개에 굴복한 나는 반 구금 상태에서 원고의 마지막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이 책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임이 명백하고, 작년 연말에 나온 두 번째 책(명리학에 관한)도, 얼마 전에 나온 책 두 권(한국 대중문화사에 관한)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저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인 이 편집자의 사주를 물어보았더니, 아뿔싸! 내게 없는 인성에 해당하는 오행인 화(火)가 명식의 한가운데에서 활활 불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분의 기운을 얻어 비어 있던 인성의 퍼즐을 채운 것이다.

책은 원고를 넘기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전국의 많은 분이 의견을 보내오고 생각보다 많은 크고 작은 오류를 꼼꼼히 지적해 주었다. 증쇄 때마다 그 의견을 반영해 수정하다 보니 책은 인쇄되고 제본된다고 해서, 그리고 유통되고 나아가 독자들에게 읽히는 것으로 완결되지 않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수정을 거듭하다 보니 두 번째 책은 아예 본문 전체를 뜯어고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완결된 결과물처럼 보이는 책도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되며 어떤 경우는 전면적 개작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내 졸저를 사고 읽고 피드백해 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에게 내 삶이 걸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 책은 내 책이 아니며 나 자신 또한 나로서 정의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되어가는 것 아닐까?

식상생재 (食傷生財), 재생관(財生官), 관인생(官印生)이라는 명리학 개념이 있다. 탐구하고 비판하는 정신이 세상의 재화와 네트워크를 이루고, 그 재물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명예와 권력이 서고, 그 명예욕과 권력의 힘은 깊은 사유와 통찰로 흘러야 한다는 말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세우게 될 것이다. 나는 ‘저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