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219)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바라본다 / 김상영 바라본다 / 김상영 큰물이 졌다. 양동이로 쏟아붓듯 장대비가 내리자, 개울은 금세 미어터졌다. 성난 파도같이 요동치는 형국이었다. 다리 밑 콘크리트 벽을 콱 들이받은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철렁철렁 차올랐다. 한 뼘만 더 쳐 오르면 우리 집 철망 울타리 밑동을 송두리째 쓸어갈 위기였다. 소싯적에 홍수로 제방이 무너지자, 아래채마저 기운 어설픈 가족사가 다시 닥칠까 안절부절못하였다. 개울을 끼고 사는 마을 사람들도 범람하는 물 앞에서 무력하였다. 이따금 스티로폼과 농약병과 호스 나부랭이 그리고 호박 몇 덩이가 엄벙덤벙 떠내려와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걸 망연자실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나마 의지하는 건 마을을 막아선 콘크리트 옹벽뿐이었다.광란의 밤이 잦아들었다. 냇물의 본성은 교과서에 실린 동요처럼 착하디착하였.. [좋은수필]무싯날 / 이정화 무싯날 / 이정화 아무 날도 아닌 날이 아니었다. 휑하던 장터에 다섯 손가락을 꼽으면 전이 펼쳐진다. 그날이 오면 돈이 돌고, 곡식도 돌고, 인심도 돌아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제사장 보러 진고개를 넘어온 할배의 쌈짓돈과 이른 새벽 황장재를 넘어온 자반고등어는 주인을 바꾼다.장터에 해가 떠오른다. 높다란 장대에 노란 고무줄, 흰 고무줄, 검정고무줄을 두툼하게 매달아 든 사내가 다가온다. 설핏 보면 사람 없이 긴 고무줄 장대가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다. 구경꾼이 겹겹이 둘러선 곳에는 원숭이가 곡예를 넘는다. 자발없는 원숭이가 웅크리고 앉은 여자아이 꽃핀을 낚아채자 아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친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포라이터와 돌, 손전등과 커다란 건전지와 잡동사니를 부려 놓고 파는.. [좋은수필]붉은사슴이 사는 동굴 / 서정애 붉은사슴이 사는 동굴 / 서정애 붉은 불빛 한 줄기가 게슴츠레 눈을 뜬다. 확대기에 필름을 끼우고 적정 빛을 준 인화지를 바트에 넣고 흔든다. 마지막 수세를 거치면 흑과 백의 피사체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액체 속의 인화지를 살짝 흔들어준다. 비로소 필름 속에 갇혀있던 사물이 제 존재를 드러낸다.중국 윈난성에는 ‘붉은사슴동굴’이 있다. 동굴 벽면에 붉은사슴이 그려져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만 오천 년 전쯤의 벽화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슴은 큰 뿔을 들이밀며 금방이라도 벽을 박차고 나올 듯 뒷다리를 앙버티고 있다. 빙하기에 살았다는 붉은사슴동굴인은 어떤 연유로 캄캄한 곳에서 벽화를 그렸던 것일까. 주술이나 신앙의 표현이었겠지만 자연의 위대함을 빌려와 자신의 소망을 거기에 투영한 게 아니었을까. 혼신의 힘을.. [좋은수필]일수불퇴一手不退 / 김광규 일수불퇴一手不退 / 김광규 들판 위를 휘둘러본다. 차가운 바람살 같은 기운이 달려든다. 경지정리가 잘 된 들판은 반듯하지만 황량해서 선뜻 발을 들여놓기 쉽지 않다. 어디에다 무엇부터 심어야 할까. 첫 삽은 설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바둑판을 상변부터 하변까지 몇 번이고 훑어 내린다.검은색 돌 하나가 힘 있게 착지한다. 화점이다. 우하귀에 아들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나는 장고에 들어간다. 포석만 잘 짜도 절반은 성공이라지 않는가. 좌상귀를 먼저 차지할 것인가. 날 일자로 다가가 공격하면서 여차하면 하변을 노릴 것인가. 부자간 삶의 대화는 묵언으로부터 시작된다.아들은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서로 속을 터놓기에는 바둑판 앞이 안성맞춤이었다. 아들이 입시를 코앞에 두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 [좋은수필]길거리 식탁과 꽃 한 송이 / 구활 길거리 식탁과 꽃 한 송이 / 구활 꽃은 먹어서 배부른 음식은 아니다. 그러나 꽃은 음식 맛을 부추기는 향료나 고명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걸 공연 예술에 대입하면 백 댄스나 배경음악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허브 식물의 꽃잎 즉 비올라, 나스터튬, 임파첸스 등을 밥 위에 얹어 꽃 밥을 만들어 먹는 걸 보면 이젠 꽃도 음식 반열에 오른 것 같다.꽃을 급수로 따지면 밥이나 향보다는 몇 수 정도 높은 것 같다. 신라 향가에 나오는 헌화가를 보면 산중 늙은이가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에게 절벽 꽃을 꺾어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하필이면 왜 꽃을 꺾어 마음을 표시했을까. 송강의 장진주사에도 꽃 이야기가 .. [좋은수필]한 평 / 조미순 한 평 / 조미순 나무판자로 대충 구분 지은 칸막이 같다. 그 공간에 들어앉은 할머니들은 소쿠리에 파, 콩나물, 도라지, 우엉, 마늘, 감자 등을 담아 내놓는다. 3.3 제곱미터도 안 되는 공간에서 백발의 억새꽃들은 분주하다. 각종 팔 것을 다듬거나 쪼개는 게 부가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욕심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부지런함이 억새꽃들의 천성이다.집 근처 골목엔 작은 시장이 형성돼 있다. 버스회사가 이전해 간 공터 주변에 난전을 폈던 이들이 가건물을 지었다. 잡곡 파는 할머니가 막걸리 한 잔으로 무료함을 달래고, 비녀로 쪽을 찐 할머니가 연방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파 다듬기 삼매경이다. 도라지를 까다가 오수午睡에 빠져들거나, 행인에게 도토리묵을 권하는 노인도 있다. 1천 원어치에도 덤이 후한 .. [좋은수필]쿠션 언어 / 정성화 쿠션 언어 / 정성화 가르치는 학생으로부터 나의 말투에 대한 불만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말에 너무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답을 하는 편이라서 무안하고 서운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내가 정말 그랬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학생은 내 말을 흉내 냈다. “안 돼”, “그건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등. 그 말들은 쌀쌀맞고 공격적으로 들렸다. 어떤 상황에 대해 빨리 의사를 밝히려다 보니 상대방을 미처 배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부드럽게 전해지도록 하는 게 ‘쿠션 언어’다. 벽에 기댈 때 쿠션이 있으면 훨씬 편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를테면 ‘미안하지만’ 또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라는 말로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토론회에서 상대방과 나의 생각이 다를.. [좋은수필]새 / 조혜은 새 / 조혜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새를 보고 새를 볼 수 없을 땐 새를 상상해 왔다. 여덟 살 때부터 치기 시작한 피아노마저 건초염으로 오 년 전 그만둬버리고 내게 취미라고는 새를 보고 새를 상상하는 것이 유일하다.눈앞에 있지 않은 새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무실 내 옆자리의 후배는 신기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유독 새빨간 입술이 백문조를 쏙 빼닮았다. 뭐 때문인지 매사에 부루퉁한 얼굴로 혼잣말이 잦은 세탁소 주인아저씨는 새카만 까마귀를, 아파트 근처 편의점의 스물 남짓한 야간 알바생은 검푸른 눈매가 도드라진 동고비를 닮았다. 세상에는 새를 닮은 사람이 아주 많다. 개나 고양이를 닮는 것처럼 사람들은 새를 닮기도 하며 특별하거나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왜 하필 새를 보는가 하면.. 이전 1 2 3 4 5 6 7 ··· 778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