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5939)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등背 / 정태헌 등背 / 정태헌 담벼락을 낀 길로 접어든다. 산길로 통하는 골목이다. 오늘따라 한적한 길보다는 수척한 등에 더 눈길이 쏠린다. 늦가을, 담쟁이 줄기들이 담벼락에 앙상하게 말라붙어 있다. 한철 무성하던 담쟁이 잎들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고 담벼락의 등엔 찬바람만 스산하게 스친다. 푸른 추억을 되작이며 함묵하고 있는 걸까. 담벼락은 잎들을 제 등 너머로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몸 푼 산모처럼 할끔하다.담쟁이 어린잎들이 처음 고개 들어 올려다보았을 때 담벼락은 절벽이었겠지. 그런 잎들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벽은 돌아섰을 테고, 그리고 스스로 등背이 돼 거칠어졌으리라. 제 등이 거칠어질수록 어린잎들이 타고 오르기 쉬웠을 테니까. 그래도 잎들은 어찌 절벽 같은 등을 타고 오를 엄두를 낼 수 있었.. [좋은수필]글은 이렇게 썩어야 하느니라 / 유병근 글은 이렇게 썩어야 하느니라 / 유병근 옆자리의 노인에게서는 퀴퀴한 썩는 냄새가 난다. 냄새에 한 방 얻어맞은 듯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냄새로 자리를 독차지한 노인은 스컹크였는지도 모른다.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지하철 노인석을 독차지한 천하태평은 그지없이 편안해 보인다. 자리를 피하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까. 험한 냄새를 풍길만한 차림은 물론 아니다. 속 다르고 겉 다르다더니 그 노인의 경우가 하필이면 그랬다.트림을 하는 냄새와는 전혀 다르다. 좀 복잡한 냄새라며 냄새를 어림짐작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냄새는 몸의 구조처럼 다양한 데가 있지 않겠느냐.아침에 먹은 김치와 그 김치가 된장국물과 섞여 나오는 냄새는 어떤 것일까. 반주로 들이.. [좋은수필]비우고 싶지 않은 것들 / 이정림 비우고 싶지 않은 것들 / 이정림 엊저녁부터 오늘 저녁까지 만 24시간 동안, 내 몸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평소에도 삼시 세끼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몸이 만 하루를 밥알 하나 구경하지 못했을 테니, 소화기관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것만 같다.나는 부엌 쪽에서 어정거리는 시간을 제일 아깝게 생각하는 사라이다. 그러니 때맞추어 삼시를 차려 먹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챙겨 먹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인도의 간디같이 깡마르거나 해야 제격일 텐데, 나는 모순되게도 그렇지가 못하다.웬만한 태풍에도 끄떡하지 않게 생긴 것은 순전히 내 착한 몸 덕분이다. 주인 잘못 만났다고 덩달아 포기하지 않고, 남산 딸깍발이 아내 어려운 살림 꾸려 가듯 몸속.. [좋은수필]악구중죄 금일참회 / 곽흥렬 악구중죄 금일참회 / 곽흥렬 박의 생김새가 특이하다. 빛깔도 낯설다. 관상용이 아닌데도, 마치 호리병처럼 길쭉한 형상에도 아직 풋기가 덜 가신 것같이 거죽이 푸르스름하다. 식용 박이라면 으레 풍만한 여인의 엉덩이처럼 둥글넓적한 데다 표면이 맥옥 같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박 같지가 않아 보인다.추석 차례상을 마련하려는 아내 따라 재래시장 장보기에 나섰다. 너도나도 마트를 선호하는 추세이다 보니 단대목임에도 분위기가 영 썰렁하다. 호주머니 속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마저 덩달아 허전해진다.장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제수용품을 얼추 사서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모퉁이 난전에 쪼그리고 앉아 박을 팔고 있는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가져온 것들이 죄 주인을 찾아갔는지 달랑 .. [좋은수필]기근(氣根) / 채정순 기근(氣根) / 채정순 따비밭 사이로 난 길은 슬쩍 밟힌 뱀처럼 구불텅하다. 산봉우리는 뽀얀 안개 너울을 쓰고 있어 신비감을 준다. 한발 한발 가풀막을 오르는 내 발자국 소리에 잠자던 나무들이 부스스 일어난다. 코끝에 닿는 공기가 삽상하다.한줄기 바람이 저만치 우거진 덤불을 헤집어 실루엣 하나를 들추어낸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 쪽박을 찼다던 이웃 여자다. 등산복 차림으로 오도카니 앉아 있는 폼이 시름을 달래려고 산행을 했나 보다. 볼이 낮달처럼 해쓱하고 눈빛마저 망각의 늪을 헤매다 온 듯 흐릿하다. 흘러오는 물을 보듬은 웅덩이를 망연히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초로 때의 나를 보는 것 같다.그 무렵, 일자리를 잃은 남편이 집에 들앉아 있어서 집 안엔 찌든 궁기만 가득했다. 나 역시 뭔가 모색할 궁리.. [좋은수필]부고 철학 / 곽흥렬 부고 철학 / 곽흥렬 언제부터인가, 전에 없던 버릇 하나가 새로이 생겨났다. 이따금 일간신문의 지면 아래쪽 끝자락에 엉버티고 앉아 나 봐달라며 퉁방울눈 부릅뜨고 있는 부고訃告에다 부쩍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한두 살씩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연스레 붙은 별스런 습관이다. 남들은 뭐 그런 시답잖은 것 따위에 집착을 가지느냐며 타박을 줄는지 모르겠다. 얼핏 생각하면 참 쓰잘머리 없는 짓같이 비쳐질 만도 하다. 하지만, 남들이야 어떻게 여기든 나대로는 제법 심각한 생의 근원적 의문에서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을 치고 있어서인 까닭이다.신문의 판짜기가 완전히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뀐 뒤에도 부고만큼은 대다수가 여전히 예전의 방식인 세로쓰기를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애써 찾지 않아도 쉽사리 눈에 들어온다... [좋은수필]어느 책도둑의 진술서 / 김응숙 어느 책도둑의 진술서 / 김응숙 배심원 여러분, 제가 책을 훔친 것은 사실입니다.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냐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우발적이었습니다. 우발적이었다는 정황증거들이 무수히 많습니다.우선 그날은 가을의 끝자락이었고, 가는 비가 오고 있었고, 따라서 잿빛하늘을 배경으로 단풍이 짙어진 나뭇잎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이미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짧은 여행을 앞두고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홀로 앉아 있었으니, 일종의 심신미약 상태에 놓여있었던 셈이지요.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제 나이가 딱 그날 같은 오십 대 중반이라는 것도 참작해 주십시오.그 카페는 많은 사람들의 이별과 만남으로 분주한 버스 터미널 앞에 있었습니다. 출발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은 손님.. [좋은수필]갇힌 음표 / 이혜경 갇힌 음표 / 이혜경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남편과 마주 앉으니 처음인 듯 새롭다. 데이트를 하면서는 가끔 노래방을 찾았지만 결혼 후에는 단 둘이 갈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갖는 오붓한 시간이라 설레기도 하지만 남편과 노래방에 와서 좋은 이유는 따로 있다. 눈치 보지 않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어서다.지긋한 연배의 사람들과 노래방에 오면 참기름 바른 트로트 판이라 마이크를 들기 어렵다.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 봐도 도무지 감정이 살지 않는다. 아직은 구성진 멜로디에 몸이 저절로 녹아들만큼 연륜이 쌓이지 못한 탓이다. 반대로 어린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속사포 랩이라도 읊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마이크를 피하게 된다. 빠른 템포의 노래는 취향이 아닐뿐더러 시종일관 뻣뻣하게 서서 노래를.. 이전 1 2 3 4 5 6 7 ··· 7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