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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부고 철학 / 곽흥렬

부고 철학 / 곽흥렬

 

 

언제부터인가, 전에 없던 버릇 하나가 새로이 생겨났다. 이따금 일간신문의 지면 아래쪽 끝자락에 엉버티고 앉아 나 봐달라며 퉁방울눈 부릅뜨고 있는 부고訃告에다 부쩍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한두 살씩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연스레 붙은 별스런 습관이다.

​ 남들은 뭐 그런 시답잖은 것 따위에 집착을 가지느냐며 타박을 줄는지 모르겠다. 얼핏 생각하면 참 쓰잘머리 없는 짓같이 비쳐질 만도 하다. 하지만, 남들이야 어떻게 여기든 나대로는 제법 심각한 생의 근원적 의문에서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을 치고 있어서인 까닭이다.

신문의 판짜기가 완전히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뀐 뒤에도 부고만큼은 대다수가 여전히 예전의 방식인 세로쓰기를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애써 찾지 않아도 쉽사리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검정 뿔테안경처럼 사방으로 굵직한 테두리 선까지 둘러쳐져 있어 절로 시선이 머물게 마련이다.

달포 전 어느 날이었던가 싶다. 한 조간신문의 사회면을 펼치다가 느닷없이 홍두깨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뜩한 정신적 충격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나란히 마주한 두 지면과 맞닥뜨리고서다. 그 가운데 한쪽 면은 하단 광고란에 시쳇말로 대문짝만 한 크기의 부고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고, 맞은편 지면에는 역시 그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본문 기사가 올곧게 살아온 명망 높은 소설가 한 분의 별세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로 엇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아니, 극명한 대비였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부고의 주인공이 스스로 자신의 대단찮은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한껏 떠벌리고 있었다면 별세 기사의 주인공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외려 마음에 우러나와 그의 아아한 생애를 추모하고 그리며 기린다는 것, 같은 현상적 죽음을 전하면서도 바둑돌의 흑백만큼이나 그 차이가 뚜렷했다.

아하 그래, 바로 이거였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소리를 뱉어내며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그건 내가 여태껏 화두처럼 붙안고 목말라했던, 인생살이의 행로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는 한 줄기 눈부신 광채였다. 순간 나의 머릿속은 타는 갈증에 찬물 한 모금을 들이켠 뒤끝처럼 상큼하게 맑아왔다. 어두시니 같이 캄캄했던 눈이 화광火光처럼 훤히 트여 오는 느낌, 이런 걸 불가佛家에서는 돈오頓悟라고 하던가.

부고의 주인공은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 필시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한세상 사는 동안 부지런히 재물을 모으고, 지위를 높이고, 권세며 명성 따위를 탐착했을 것이다. '내가 이만큼 대단하게 살았노라' 이렇게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아직도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 남은 이들을 향해 한껏 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야 물론 당자 아닌 그의 피붙이의 처사이긴 하겠지만, 따지고 들면 그 큰 지면을 차지하는 데 들였을 고액의 광고비는 어차피 사자死者의 호주머니에서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부고의 속성은 무엇보다 그 문구의 화려함에 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으레 세속적 가치를 좇아 한세상 허둥대며 살아온 그의 생전의 이력이 소상히 오른다. 00회사 사장, 00학교 재단 이사장, 00회 회장, 00연구소 소장​, 00위원회 위원장…. 열 손가락으로 꼽기에 모자랄 굵직굵직한 직함들이 나 보아란 듯이 내걸린다. 마치 가슴팍 가득 달려 있는 주렁주렁한 훈장처럼. 하지만 그런 수다한 직함들이 묵은 빨랫감같이 추하고 낡아빠진 가구마냥 값어치 없어 보이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대인은 자신에게 추상秋霜같이 엄격하고 남에게 더없이 관대한 사람이며, 소인은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 비상砒霜처럼 엄격한 사람이다. 이렇게 가르친 논어의 말씀에 기댄다면, 부고의 주인공은 필시 소인이며 별세 기사의 주인공은 대인임이 분명하리라. 자고로 남에게 관대하여 세속적 영달 얻은 이 드물며, 자신에게 관대하여 눈에 보이는 화려함 구하지 못한 자 드물었기 때문이다.

명예란 명성이 높다고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아니며 또 억지로 구한다고 얻어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명성 혹은 세속적 인기와 거리를 둘 때 역설적이게도 거기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내가 이제껏 부고를 너무 홀대한 것 같아 그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잠시 생각을 달리해 보면, 부고 또한 그 나름의 충분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

나는 신문의 '부고란'을 읽을 때 자주 죽음의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한다. 나약한 인간에게 죽음만큼 가슴 서늘한 주제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죽음은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그윽이 응시하게 하고,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사에 침몰하여 한동안 놓치고 있던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해 주는 눈 밝은 스승이다. 죽음의 전령사인 부고야말로 우리에게 이 스승을 찾아주는 충직한 길잡이가 아닌가.

죽음 앞에 조금치의 거리낌도 없을 만큼 떳떳하고 당당할 자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일상에서 죽음과는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남남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날아든 가까운 친지나 벗, 아니면 아끼던 후배의 부고를 받고서 화들짝 놀라는 것이다. 그것은 뒤통수를 내리치는 충격이다. 그 충격으로 문득 한동안 잊고 있었던 죽음을 다시 의식 가운데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는 허망스럽고 두려워져서, 자신의 거쳐 온 삶이며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조용히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뉘우침으로 치환된다. 나는 여태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화려함, 손에 잡히는 현상적 가치, 그 허상만은 좇아 허둥지둥 비틀거리며 예까지 걸어온 것은 아닌가. 사람살이의 참다운 의미는 분명코 이게 아닐 터인데​…. 대개 이런 등속의 후회들이다. 뉘우치는 자세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뉘우침은 우리의 삶을 반짝이는 보석처럼 가치 있게 다듬는 효과 탁월한 연마제이다.

늘그막까지 지위며 권세며 명성 따위를 탐하고 끝 간 데 없이 재물에 집착하는 것은 허섭스레기처럼 추잡해 보인다​. 아니, 불쌍하고 비참해 보인다는 말이 오히려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젊은이의 욕망은 혹여 진취적인 의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련만, 늙은이의 욕망은 한갓 부질없는 노회老獪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해서 단 오 분 동안만 생각해 잠긴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이럴 경우 우리들 캄캄한 인생 항로에 반짝이는 등댓불이라 해도 좋으리라.

죽음은 생명 가진 만상萬象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일 터이다. 절대자의 섭리에 대한 서늘한 깨달음, 그에 따라 순간순간 무명無明의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 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바로 이 부고가 아닐까. 그러기에 부고도 이런 까닭에서 더없이 뜻깊고 값지다.

무릇 세상만사가 다 우리들 생각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했다. 새삼스럽게 이러한 생사의 이법을 깨달으며, 나는 오늘도 부고 앞에 옷깃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