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氣根) / 채정순
따비밭 사이로 난 길은 슬쩍 밟힌 뱀처럼 구불텅하다. 산봉우리는 뽀얀 안개 너울을 쓰고 있어 신비감을 준다. 한발 한발 가풀막을 오르는 내 발자국 소리에 잠자던 나무들이 부스스 일어난다. 코끝에 닿는 공기가 삽상하다.
한줄기 바람이 저만치 우거진 덤불을 헤집어 실루엣 하나를 들추어낸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 쪽박을 찼다던 이웃 여자다. 등산복 차림으로 오도카니 앉아 있는 폼이 시름을 달래려고 산행을 했나 보다. 볼이 낮달처럼 해쓱하고 눈빛마저 망각의 늪을 헤매다 온 듯 흐릿하다. 흘러오는 물을 보듬은 웅덩이를 망연히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초로 때의 나를 보는 것 같다.
그 무렵, 일자리를 잃은 남편이 집에 들앉아 있어서 집 안엔 찌든 궁기만 가득했다. 나 역시 뭔가 모색할 궁리는 못하고 스스로 무지렁이라 단정 지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를 안 친척이 동업을 하자며 뭉칫돈을 채 가서는 소식이 두절되었다. 눈앞이 캄캄해 그를 사방팔방 찾아다녔지만 헛수고만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은 화면 속의 풍경 같았다. 눈만 뜨면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던 보잘것없는 자격지심이 친척도, 친구도, 이웃도 마다했다. 여태껏 마음이 질척거릴 때마다 찾은 산마저 그들과 마주친다며 가지 마라 엄포를 놓았다. 안식처였던 집은 발이 묶이니 담장이 낮은 감옥으로 변했다. 샘솟는 욕망을 누르며 침묵을 일삼는 감옥에도 유일하게 찾아드는 손이 있었다. 자칫하면 단물 뒤에 우러나는 껌처럼 우울을 불러들이는 고독이다. 이 고독을 음미하다 뜨거운 국물처럼 황급히 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팔다리를 부단히 움직이면 생각이 순해진다고 한다. 맨손 체조를 하며 창으로 들어오는 산을 마주한 기억뿐인데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 산비탈에 쫓기는 짐승처럼 헉헉대고 있었다. 그제야 '억눌린 의식이 무의식이 된다' 고 한 한 정신분석학자가 떠오르며 내 무의식이 발로했다는 생각에 강한 전율이 일어났다. 산으로 몸을 데려다 놓은 무의식은 그새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산봉우리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지만 헐렁한 원피스 차림이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점이 범죄를 유발시킨다기에 발이 절로 덤벙대며 좁다란 산길을 툭툭 차며 내려왔다. 발밑으로 잔돌 구르는 소리가 자그러웠다.
주위를 얼핏 둘러보았다. 저만치에 물비늘을 일으키는 웅덩이가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물고기와 물풀을 나름대로 거두는 소박한 연못이다. 높지 않은 산역에 와 있다고 느끼는 순간 어깨에 맴돌던 불안감이 주춤 물러났다. 못가에는 우람한 낙우송이 푸른 팔을 제멋대로 내젓고 있었다.
예의 웅덩이는 하늘의 막 생기기 시작한 낙조를 담기에 바빴다. 불그레한 낙조가 상처의 고름 같아 어서 지나치려고 마음 먼저 내닫는데 내 그림자에 웬 그림자가 포개졌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남정네 둘이도 살풍경을 연출하는 웅덩이가 보기 싫은지 나처럼 하산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낙우송 주위에 혹이 듬성듬성 나 있는 것을 보고 기근이라고 했다. 여느 나무들은 물을 찾아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낙우송은 공기를 마시러 땅 위로 혹을 낸다고 했다. 난초나 옥수수의 기근은 바위 사이로 내놓은 노근(露根)처럼 이슬이나 빗물을 받아먹기도 하지만 물이 질펀한 장소에 생장하는 낙우송은 그럴 필요는 없다는 부언도 잊지 않았다.
나무는 대부분 물을 찾아 뿌리를 내리듯이 얼마 전까지 우리네 사회 역시 남자들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가계를 이끌었다. 척박한 땅이라 노근으로 연명해도 여자들은 팔자려니 치부하고 부엌에만 매달렸다. 우리 가정 역시 남편이 자아올린 자양분으로만 지탱했기에 내가 나서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도 맞벌이를 하는 여장부도 많았는데 왜 내 눈엔 그들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남자를 제치고 겁나게 돈을 주무르며 인간 승리를 이룬 여걸들이 고금을 통해 지면에 나오는데 말이다. 어쨌든 어떤 전문 기술도 없을 뿐 아니라 대가족 살림에 병약했던 나는 그쪽으론 언감생심이었다.
산을 내려오는데 물을 저버리지 않고 잘 살아가는 낙우송처럼 우리 살림 역시 남편의 노근뿐 아니라 나의 기근으로도 살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샘처럼 솟아났다. 산소 같은 돈을 집 안에서 만드는 계획이 새록새록 운명처럼 떠올랐다.
우리 집 아래층에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조그만 점방이 있다. 아버님이 젊었을 땐 장사가 잘되어 집을 두 채나 장만했고 우리 애들이 어릴 때까지도 짭짤하게 수입을 올린 효자 점포였다. 하지만 인근에 같은 업종 가게가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또 아버님이 연세가 드셔서 공사를 나가지 못해 사실상 죽어 있었다. 그곳을 손봐서 팔리지 않으면 우리가 써도 되는 생필품 가게를 차렸다. 집안 형편이 밖의 일터는 그림의 떡인 내게 안성맞춤인 일터가 되었다. 밖에서 보면 파리만 날리는 것 같지만 첫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영업을 하기에 문을 닫고 수익을 보면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 지금이야 자식들이 다 자라서 그들 밑 닦기도 바쁘지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허우적거렸던 그 당시를 뒤돌아보면 내겐 낙우송이 희망의 화신으로 다가왔다.
내 발걸음 소리에 여자도 고개를 들어 본다. 이마를 약간 숙이고 군빗질을 하며 벌써 하산하는 길이냐며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물가의 풍경을 보던 시선을 거두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떡이는 여자도 어쩌면 기근이 가슴에 와닿았는지 모른다. 화창한 햇살에 빛바랜 접대용 미소가 애처롭다.
많은 산길을 두고 하필 이쪽으로 오른 것은 나만의 절절한 기억 때문이다. 기억은 습관과 버릇을 만들기도 하니까. 곰살가운 햇살이 어느새 골짜기를 감싼다. 자욱하던 산봉우리 안개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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