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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미숙한 이별 / 이미영 미숙한 이별 / 이미영   미숙美淑씨는 늘 자신이 미숙未熟하다고 말한다. 부모님이 대충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릴 때부터 자신은 미숙하게 살 운명이었나 보다 하고 호탕하게 웃는다. 그에게 한 번 몸을 맡긴 사람들이 쉬이 떠나지 않는 걸 보면 그가 아름답고 맑은 사람인 줄 아는 까닭이다. 그의 이름이 이서나 지안이가 아닌 것처럼 그의 가게도 90년대 어느 골목에서 그대로 멈춘 것 같다. 윤기가 가신 붉은 벽돌 삼 층 건물 꼭대기에 붙은 간판은 칠이 다 벗겨진 채 간판 시늉을 한다. 어디에도 영업을 알리려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그가 가게 앞 좁은 공간에 미리 나와 손을 흔들지 않았더라면 네비 양의 도착 안내를 무시하고 지났을 것이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랗게 웃는 여자가 백화점 주차 요원처럼 양손을 빙글빙..
[좋은수필]상추쌈 / 김남희 상추쌈 / 김남희  썰렁한 적색 등만이 가득한 삼겹살집이다. 식당 안은 미안할 정도로 조용하다. 늦은 퇴근에 배가 고프니 시야까지 흐릿하다. 된장찌개에 밥 한 그릇이 간절하다. 삼겹살 3인분과 된장찌개 그리고 공깃밥을 주문하자 고기보다 반찬들이 먼저 나온다. 기다릴 틈도 없이 허겁지겁 반찬들로 배를 채운다. 빈 접시들이 바닥을 드러내자 아르바이트생이 반찬들을 보충해 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앳된 얼굴이 고등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인다.때마침 숯불이 피었는지 화로를 나른다. 이제 막 자신을 태워 불씨를 살리는 숯불의 모습을 보자 학생의 처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또한 세상을 향해 막 발을 내디뎠으리라. 숯불을 아궁이에 끼우는 그의 뒷모습에 왠지 마음이 쓰인다. 불판이 달자 고기까..
[좋은수필]시간의 단면 / 맹난자 시간의 단면 / 맹난자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그곳에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있었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기상천외한 그의 독창성 때문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전시장은 '꿈의 환상' '관능성과 여성성' '종교와 신화' 세 가지 주제로 꾸며져 있었다. 그가 초현실주의를 채택하게 된 것도 다름 아닌 꿈과 현실 사이의 대조이거나 혹은 상충 때문이라고 했다.그래서 그런지 그는 자신의 야생적 이미지를 꿈을 통해 표출해 내고 있었다. 도 새로웠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흡사 사슴뿔처럼 생긴 두 개의 나뭇가지에 걸쳐져 녹아내리고 있는 시계였다.이라는 제목의 청동 조각품이다. 갈색 시계 판에서 뚝 뚝 아래로 녹아내리는 쇳물은 마치 시계가 흘리..
[좋은수필]바라던 영원만 외롭게 남고 / 김상립 바라던 영원만 외롭게 남고 / 김상립   우리 인생살이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모순 중의 하나가 영원한 게 그 어디에도 없는 데 계속 갈망하며 사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살고 있으니, 세상은 실망과 아쉬움이 차고 넘친다. 흔히 사용되는 영원이란 말은 제가 바라는 길이만큼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한결 수월할 터인데, 영원에는 늘 지나친 욕망이 따라붙으니 탈이다.인류가 암만 영원토록 살고 싶어도 실상 100년을 채우기도 힘들다. 남녀가 영원한 사랑을 날마다 노래하고 살아봐도, 둘 중 하나가 배신하거나 병이나 사고로 일찍 죽으면, 별수 없이 눈앞의 사랑은 끝나야 한다. 내 자신도 청소년 시절에 아름다운 첫사랑 소녀를 만나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
[좋은수필]박수 칠 때 싸워라 / 이혜숙 박수 칠 때 싸워라 / 이혜숙  드디어 우리 가정에도 여문 평화가 오려나보다. 자식들이 싸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인가.무슨 엄마가 자식 싸움을 바라느냐고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어린 시절 치고받고 해야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해진다는 게 내 지론이다. 싸우다 보면 억울하고 분하고 미운 감정이 들 테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화해의 과정에서 한층 성장하고 끈끈해지는 ‘싸움의 순기능 내지 싸움이 가져올 미래의 긍정적 방향’을 생각해서 한 번 화끈하게 붙어보길 바랐던 것이다.그러나 남매의 터울이 다섯 살이다 보니 크는 동안 도무지 엉길 일이 생기지 않았다. 매사 야무진 누나와 느긋하고 꼼꼼하지 못한 동생이 어려서부터 누나의 훈계를 듣는 사이로 크더니 스무 살이 넘어서는 각자의 선을 긋고 ..
[좋은수필]예절 / 정임표 예절 / 정임표  친구 간에 놀다 보면 난감한 경우를 당할 때가 있다. 술을 한잔하고 분위기가 좋아지면 제 딴에는 정을 낸다고 욕을 섞어서 말하거나, 때로는 곁에 앉아 뒤통수를 툭툭 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꼴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당장 화를 내기도 뭣하고, 참고 있자 하니 그 수모가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욕쟁이 친구란 게 있다고들 하지만, 아무려면 욕이 칭찬보다 아름다울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대게가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인격 파탄자이거나, 그 심리가 평소에 남을 안하무인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특히 남의 뒤통수를 동네 북 치듯이 툭툭 치는 행위는 친밀로 위장된 모욕주기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더 상스러운 욕설로 되받고, 사정없이 그의 뒤통수를 갈겨주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은, 그건 우정이 ..
[좋은수필]폐허 / 강천 폐허 / 강천  폐허 위에 서 있다. 흔적만 남은 옛 절터에는 개망초가 주인 행세를 하며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산 아래 구형왕의 돌무덤을 거쳐 온 바람이 망국의 아픈 기억들을 실어다 줄 때마다, 개망초는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반복한다. 마치 사라져버린 왕국에 대한 애도의 조문처럼 하얗게 일렁인다. 왕릉의 수호사찰이었다고 전하는 이곳 왕산사지에, 망국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개망초가 가득하다. 이 기묘한 조화가 세월의 우연일까, 역사의 필연일까.왕산,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양왕讓王이 신라에 나라를 양도하고, 이곳으로 들어와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산 아래에는 왕릉이라고 알려진 전傳 구형왕릉仇衡王陵이 있고, 산 위에는 왕대王臺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록 고증적 증거는 빈약하지만, 주변 곳곳에 널린..
[좋은수필]옛 생각 / 곽흥렬 옛 생각 / 곽흥렬  산골의 여름은 뻐꾸기 소리로 온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할 무렵, 세상의 풍경이 나른해지는 오후가 되면 저 멀리 산등성이 쪽에서 남편 잃은 청상靑孀의 피울음처럼 뻐꾸기가 "뻐꾹~ 뻐꾹~" 처량하게 목청을 뽑는다.무연히 턱을 괴고 앉아서 허공으로 오래 눈길을 보낸다. 흘러간 날들의 정경이 주르르 망막에 맺혀 온다. 마흔몇 해 전 가수 조영남이 불렀던 '옛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흥얼거려진다."뒷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꽃댕기 매고 놀던 옛 친구 생각난다. 모두 다 어디 갔나 보두 다 어디 갔나 나 혼자 여기 서서 지난날을 그리네."가만히 노래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으려니 가슴에 싸한 바람이 인다. 삼십 년 전의 일은 낱낱이 기억되어도 눈앞의 일은 금세 잊어버리는 것이 노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