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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마음이 허해 올 때면 / 곽흥렬 마음이 허해 올 때면 / 곽흥렬  가을이 깊어간다. 계절성인가,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무언가 말로는 풀어낼 수 없는 상실감으로 마음에 허기가 진다.이럴 땐 무작정 발길 닿는 데로 내맡겨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산길을 오르고 강변을 거닌다. 공연장을 찾고 전시장을 쏘다닌다. 한동안 그렇게 전전하다 보면 울적한 감정이 시나브로 가라앉곤 한다.어저께는 문화예술회관으로 걸음이 옮겨졌다. 거기서 뜻하지 않게 ‘어린 시절에’라는 표제를 건 ㅅ화백의 닥종이 인형전시회를 만난 것은 적지 않은 안복이었다. 몇 해 전, 비슷한 주제로 이승헌, 허은선 부부 화가의 인형전인 ‘엄마 어렸을 적에……’를 보고 난 후, 곱게 개켜져 있던 그날의 감회가 불현듯 되살아났다.기억의 언덕을 더듬어 올라가자 어린 시절의 정경이 눈..
[좋은수필]나싱개 / 최태랑 나싱개 / 최태랑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이 점점 짜진다.아내의 변명을 빌리자면 차린 반찬이 줄지 않아 자꾸 데우고 끓여서 그렇단다. 아니다. 아내의 기억력 때문이다. 아내는 금방 간한 것을 까먹고 여러 번 간을 한다. 그러니 간이 짜질 수밖에, 매번 똑같은 변명을 하는 아내가 측은하기 그지없다. 날이 갈수록 해마(뇌)가 줄고 알약 숫자는 늘어난다. 의사는 유전인자 때문이라 하는데 실은 내 탓인 것 같아 죄스럽다. 군인이었던 나를 따라 전후방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삿짐을 수도 없이 묶고 푸는 사이 내조의 병이 돋은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든다. 모처럼 같이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 노점상 할머니가 파는 봄나물 냉이가 보였다. 서너 발자국 뒤따라오던 아내가 뜬금없이 나싱개를 캐러 가잔다. 아내가 말하는 나..
[좋은수필]미늘 / 유진선 미늘 / 유진선  별이불이 총총하게 깔렸다. 오늘따라 늑장을 부리는가, 달은 아직 보이지 않고 서늘한 어둠만 가득하다. 늦더위가 유난하던 며칠 전과는 달리 어느새 가을이 덥석 안기는 것만 같다.오랜만에 근처 사는 오빠 내외와 낚시를 갔다. 반짝이는 물비늘이 눈부시다. 낚싯대를 펼치고 평평한 곳을 찾아 앉았다. 치장하지 않은 주위 풍경은 흑백사진마냥 정겹고, 새우 미끼의 비린내와 깻묵 냄새가 순식간에 수십 년을 거슬러 간다. 어릴 적 기억과 몇 년 전 일들이 뒤섞여 일상인 듯 익숙하다.어릴 때처럼 오빠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뭔가 조금씩 대화가 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조카를 헷갈려 하고 앞뒤 없는 이야기를 불쑥 내뱉는가 하면 화장실을 간다면서 주저 없이 물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
[좋은수필]마지막 손길 / 고경남 마지막 손길 / 고경남   ​"재수 없어." 백혈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가 혼잣말로 중얼댔다. 상담실에 아빠와 같이 앉아 있던 아이는 짜증 난다는 말투로 물었다."그럼, 암이네요?" ​"일종의 암이기는 한데, 혈액에 나쁜 세포들이 늘어나는 악성 질환이야. 혈액암이라고도 하는…." ​"암 맞네요. 진짜, 재수 없네."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아빠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이 선생님 말고, 내가 재수가 없다고. 맞잖아?" ​그때 아이의 팔목에 새겨진 조그마한 나비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아이는 아니구나.아빠는 고등학생 딸이 백혈병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타나게 마련인 놀람과 불안과는 다른, 좌절과 피로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
[좋은수필]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 최장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 최장순   산책길의 천변, 잠을 자는 오리의 모습이 모두 물음표다. 문득 왜 그들은 외로 목을 틀고 잠을 자기를 고집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가만히 살펴보니 무리 중 오른편으로 고개를 튼 놈도 더러 보였다. 아니, 아예 부리로 중심을 잡는 듯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잠자는 놈도 있었다. 고개를 외로 틀고 외다리로 서있는 놈들은 분명 나의 눈에는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이 외로 고개 틀고 한 다리로 서서 자는 것은, 오른손에 익숙하고 두 다리로 서야 편안한 나의 습관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사람의 열에 아홉이 오른손잡이라고 한다. 9할의 우수자右手者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통념을 갖는 것은 나와 같은 오른손잡이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왼손은 오른손의 보조역할일 뿐이며 오른..
[좋은수필]돈과 행복은 얼마나 친할까 / 서숙 돈과 행복은 얼마나 친할까 / 서숙  내 천성에는 약간의 트위스트가 들어있다. 액면을 뒤튼다. 가령 누군가가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기염을 토하면 나는 신속한 결론에 닿는다. 아하, 저 사람은 돈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군. 또는 어떤 이가 돈, 그거 좋지요, 웃으며 말하면 저 사람이야말로 돈의 과부족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을 사람이로구나, 적어도 돈에게 행복을 구걸하지는 않겠는걸, 혼자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런 직감이랄까 어설픈 진단이 종래에 그럭저럭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당도하여 반어적 심리탐색에 확신이 쌓여만 간다. 사람들은 유독 돈에 대해서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나의 아버지는 재물을 쌓는 삶을 경원시하여 당신의 여유를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자 했다. ..
[좋은수필]어탁 / 제은숙 어탁 / 제은숙  훤칠한 붕어가 목상에 누웠다. 입을 벌리고 희멀건 눈을 뜬 채 초점도 잃었다. 목욕재계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았으나 황망히 떠나올 적 입었던 비늘 옷 그대로다. 몸은 축 늘어졌으되 유선형의 몸매가 매끈하고 지느러미는 한껏 펼친 모양으로 줄에 엮여 고정되었다. 거칠게 치뻗은 모습이 펄떡거렸을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한다.가지런한 비늘 위로 차가운 물감이 덮인다. 생전의 몸피와 흡사한 색으로 배합되었다. 붓으로 드문드문 안료를 올리고 색깔의 틈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공을 들인다. 지느러미 사이도 놓치지 않고 촘촘히 공간을 채운다. 이승의 마지막을 곱게 화장化粧시키어 생기를 불어넣는다. 몸단장이 끝나면 물을 뿌려둔 정갈한 한지를 덮어 꼼꼼하게 누른다. 마르기를 기다리면 겉피에 남아있던 습..
[좋은수필]은하수를 덮고 모래밭에 누워 / 이향아 은하수를 덮고 모래밭에 누워 / 이향아  퇴직을 하면 실컷 여행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 시간에 배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국의 황하 유역,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 이름을 줄줄이 외우면서 찾아갈 날을 기다렸다. 그래도 실크로드를 여행한 것은 생각할수록 잘한 일이다.돈황의 막고굴莫古窟을 향해서 버스가 일직선으로 뻗은 길을 3시간이나 달릴 때 시야에는 온통 사막밖에 없었다. 나는 지평선, 지평선이라고 소리 내어 읊었다.막고굴에 도착하여 떠나온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전화를 했다. 간밤 꿈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집은 모두들 무사하다고 했다. ​그날 오후 다섯 시 명사산에서 낙타를 타기로 되어 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