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등背 / 정태헌

등背 / 정태헌

 

 

담벼락을 낀 길로 접어든다. 산길로 통하는 골목이다. 오늘따라 한적한 길보다는 수척한 등에 더 눈길이 쏠린다. 늦가을, 담쟁이 줄기들이 담벼락에 앙상하게 말라붙어 있다. 한철 무성하던 담쟁이 잎들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고 담벼락의 등엔 찬바람만 스산하게 스친다. 푸른 추억을 되작이며 함묵하고 있는 걸까. 담벼락은 잎들을 제 등 너머로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몸 푼 산모처럼 할끔하다.

담쟁이 어린잎들이 처음 고개 들어 올려다보았을 때 담벼락은 절벽이었겠지. 그런 잎들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벽은 돌아섰을 테고, 그리고 스스로 등背이 돼 거칠어졌으리라. 제 등이 거칠어질수록 어린잎들이 타고 오르기 쉬웠을 테니까. 그래도 잎들은 어찌 절벽 같은 등을 타고 오를 엄두를 낼 수 있었으랴. 벽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겠지. 저 거친 등이 아니었던들 담쟁이 잎들은 담장 너머를 꿈이라도 꿀 수 있었겠는가.

하여 담쟁이 잎들은 제힘으로 벽을 기어올랐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애오라지 자신들을 키운 것은 거친 저 등이라는 것을, 등을 흔쾌히 내어주었기에 벽을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오르다 힘에 부쳐 쩔쩔맬 때는 등불을 켜들고 손뼉을 치며 다독이던 담벼락의 다순 손길과 눈길을 망각하지 않는다.

이럴진대 유정한 인간임에랴. 뙤약볕이 내리쬐는 길가를 걷다 만난 그 등이 아직도 눈에 솜솜하다. 신축 중인 공사장 앞, 서너 명의 일꾼들이 골조만 세운 계단 밑에서 새참을 먹는 중이었다. 먹을거리라야 김치와 두부 몇 모에 막걸리 서너 병이 전부였다. 쭈그려 앉은 한 뒷모습, 길가를 등진 늙수그레한 사내의 구부정한 등이 유독 눈에 파고들었다.

숭숭 구멍이 나고 구중중한 러닝셔츠 사이로 등이 보였다. 검붉게 탄 거친 등이 그 구멍 사이로 드러난 것이었다. 저 등으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질통을 짊어지고 휘청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렸을까. 그래도 등은 그에게 곤고한 생을 떠받드는 유일한 도구였으리라. 누구를 위하여 저 등은 무량한 짐을 져야 했을까. 등판에 낙인처럼 찍힌 질통의 어깨끈 자국, 그래도 등은 그에게 결곡한 생의 지렛대였으리라. 그동안 등 앞쪽 가슴에는 어떤 생각들이 헤집고 스쳐 지나갔을까.​ 어쩌면 등이 이편저편 모두 쓰리고 뜨겁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저 등을 밟고 오른 이들은 등 너머에 있는 밝은 세상을 만났을까. 좀체 발길을 뗄 수도 눈길을 거둘 수도 없었다.

골목을 벗어나 산비탈을 오르며 담벼락과 그 사내의 등이 갈마든다. 그 살피로 아버지의 등이 파고든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유년 적, 동무들과 돌팔매질을 하며 놀다가 그만 동무가 던진 돌멩이에 맞고 말았다. 이마가 터져 피가 흐르는데 어찌 알고 달려온 아버지는 동네를 급히​ 나섰다. 아버지는 피를 흘리는 자식을 등에 둘러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읍내 병원을 향해 뛰고 뛰었다. 다행히 상처는 눈을 피해 큰 화는 면했지만 마냥 피를 흘렸다면, 바늘로 꿰매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마에 큰 상처를 지닌 채 살았을는지 모른다. 지금도 이마에 난 희미한 상처를 볼 때마다 달리며 몰아쉬던 아버지의 숨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아니 그보다 더 뜨겁던 아버지의 등이 생각나 그곳에 맞닿았던 가슴이 이내 더워 온다. 그날, 아버지는 어린 자식의 몸뚬이뿐만 아니라 푸른 꿈까지도 짊어지고 한껏 뛰었으리라.

이젠 그 아버지의 등을 볼 수가 없다. 그래, 그렇다. 등은 흔히 눈에 띄지도 않고, 쉽사리 바라볼 수가 없으며, 언젠가는 사라진다. 얼굴처럼 매만질 수도 가꿀 수도 없어 내버려두다시피 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잊히기 쉽고 푸대접 받기 일쑤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이 주변의 방패막이가 되고, 제 뼈를 감싸며 요긴하게 버팀목 구실을 한다. 눈길을 받지 못해도 제 소임을 톡톡히 하는 곳이 등이지 않은가.

산마루를 향해 오른다. 산 또한 돌아서서 묵묵히 등을 내주었기에 기꺼이 오르고 있다. 깎이고 파인 산의 거친 등이지만 제 소임을 톡톡히 하고 있다. 넘어지거나 무릎이 꺾이지 않도록 발목을 받치고 붙들어 준다. 담벼락과 산, 사내와 아버지의 등은 같은 이름이다. 마땅히 경배해야 할 숭고한 이름이 아닌가. ​

가쁜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발길을 멈춘다. 저 편에 서 있는 어린 굴참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시 눈길을 돌려 올라온 길을 바라보니 이제야 비로소 보인다. 앳된 굴참나무에 버팀목이 되어준 거친 등이 도렷하게 보인다. 한데 웬일인가. 산의 등을 오르는데 내 등이 새삼 따가워지니 말이다. 시방 나는 어느 누구에게 어떤 등이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