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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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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늦은 출가 / 곽흥렬 늦은 출가 / 곽흥렬 인구의 고령화 현상이 불러온 사회문제가 화젯거리로 떠오른 지 오래다. 장수 시대의 도래로 인하여 초래된 피치 못할 결과일 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점차 개선이 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암울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비단 어느 한 분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형국이다.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는 것은 유치원 아니면 학교이고, 생겨나는 것은 노인병원 아니면 요양시설이다. 계속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되고 말 것인가. 그 암울한 미래상을 떠올려 보노라면, 생각만으로도 벌써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온다. 인연 있는 스님과 함께 가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
[좋은수필]거머리 / 강돈묵 거머리 / 강돈묵 어린 날의 추억은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문득 되살아난 어린 시절의 기억은 한없는 늪으로 나를 끌고 간다. 그곳에는 젊은 내 부모님이 계시고, 바짓가랑이 터서 입고 논바닥을 뒤지던 내 어린 시절이 남아 있어서 좋다. 배고파 감나무 밑을 서성이던 보고리 든 점순이의 모습이 있고, 호주머니 터지도록 알밤을 주워 담은 쇠돌이의 흘러내린 바지가 보여서 참 좋다. 농약을 쓰지 않은 논에는 많은 것들이 살고 있었다. 논두렁에 빗대선 감나무에서 도사리 감이 떨어져도 개의치 않고 주어먹어도 되었다. 완전 무 농약의 논에는 미꾸라지, 송사리, 개구리 등이 살았다. 거머리는 발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피를 빨았다. 발목에 붙은 것을 손으로 잡아당겨 겨우 떼어버리고 나..
[좋은수필]뿌리에게 / 이미영 뿌리에게 / 이미영 이태 전에 새끼손가락만 한 풍란 하나를 샀다.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여린 초록 잎을 나풀거리며 "저요, 저요." 손짓하는 것 같아 덥석 집고 말았다. 베란다에 놓아두고 내키는 대로 물을 주었다. 좁은 잎사귀가 오그라들 지경까지 한 방울도 주지 않고 방치하기를 여러 날이었다. 이끼 사이로 드러난 허연 뿌리는 목이 마른지 충분한지 신호를 보내는데도 그 녀석의 상태를 살피기보다는 손이 닿는 대로 하였다. 그러구러 내게서 두 해를 버틴 풍란은 올봄 제법 반질거리는 몸체로 자라 있었다. 천성이 벼랑 끝에서 바람을 맞으며 산다더니 감옥같이 꽉 막힌 공간에서 어찌 견뎠는지 기특하다. 옛 성현들은 유배지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더니 이 녀석도 해남이나 흑산도 출신인가 보다. 사람들..
[좋은수필]곡선, 그 화려한 유혹 / 한상렬 곡선, 그 화려한 유혹 / 한상렬 한 마리 백조가 호수 위를 난다. 우수의 깃을 접고 유유히 나래를 친다. 그를 향해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보기에 따라 시화詩化된 영혼의 상징으로 보이는가 하면, 한낱 정욕의 대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백조는 곧잘 여인의 아름다움에 비유된다. 이상李箱이었던가. 여자를 양파에 비유한 작가의 그 달관이 부럽다. 아무리 껍질을 벗겨도 자꾸만 그 내피內皮의 미로가 다하지 않는 육체의 현실. 여인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아무도 그 현주소를 가리키기 쉽지 않다. 겨울철 사무실에서 바야흐로 노변정담이 익어가고 있었다. 어느 직장의 상사가 여직원에게 저녁을 사주겠다고 데리고 다녔다 한다. ​ 처음에는 술집에서 간단히 술을 마셨다. 남자는 운전 때문이..
[좋은수필]누드모델 / 서은영 누드모델 / 서은영 여자의 몸은 곡선이다. 부드럽게 흐르는 그 안에 뼈마디 관절이 들어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둥근 아기집을 품고 지아비를 품고 세상마저도 품어내는 여자는 태생부터 곡선이어야 하는 숙명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신비로운 탄생의 공간을 품으며 동그랗게 무엇이든 갈무리하고 밖으로 내색하지 않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여자의 몸, 가히 곡선의 겹침이다. 시도 때도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하던 여중생 때였다. 미술 시간은 시험 기간이나 되어서야 다른 과목들처럼 책을 펼치고 약간의 이론 수업을 했다. 총각 미술 선생님이 ‘누드화란 말이지….’라고 설명하자 나른하던 교실 분위기가 일순간에 긴장감 속으로 빠졌다. 나비 한 쌍만 어울려 날고 있어도 공연스레 얼굴이 붉어지던 우리는 덜 익은 풋사과처럼 ..
[좋은수필]귀로 보고 마음으로 듣다 / 피귀자 귀로 보고 마음으로 듣다 / 피귀자 비는 온전히 내게로만 온다. 땅과 하늘과 그 사이를 가득 메운 물방울들, 깊고도 높고 넓고도 좁다. 온 데와 가는 곳은 또 어디인가. 오래 망설이다가 비닐 우의에 의지한 채 쏟아지는 빗줄기에 몸을 맡겼다. 몇 방울만 맞아도 어깨가 묵지근하다. 세계가 그 안에 맺힌 듯 옹골차다. 희붐한 새벽 기운이 시린 마음을 감싸 안는다. 산사의 시계는 더디게 갔다. 천지가 개벽할 듯 밤새도록 바람은 비를 부르고 우박과 천둥 번개가 이어져 두려움의 강도는 높아져 갔다. 자연이 혼을 빼놓았다. 겨우 얻은 잠자리가 법당 안 구석 자리인지라 그래도 마음은 놓였으나 섬광 속에서 오래 뒤척였다. 난생 처음 누워보는 곳인 데다가 어둠 속 부처의 형상이 번쩍거리고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여러 줄..
[좋은수필]도둑 고양이 / 정호경 도둑 고양이 / 정호경 쾌속 여객선 ‘데모크라시호’가 거문도 선착장에 닿자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촌리로 건너가는 나룻배가 우리 일행을 곧장 담아 싣고 떠났다. 그 해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산등성이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여수 앞바다는 아득히 펼쳐진 초원 그대로다. 사방으로 둘러앉아 있는 섬들이 바람을 막아 파도가 꼼짝을 못하게 머리를 눌러 놓은 때문이다. 호수보다 잔잔했다. 바다는 흰 거품을 내뿜는 파도가 있어야 제맛이지 그렇지 않다면 뱃멀미 약은 무엇 때문에 만들어 놓았겠는가. 매일 내려다보는 바다 풍경도 이젠 해묵은 이발소 그림이 되어 흥미를 잃고 따분하게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서울의 직장 동료였던 남기호 선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고향이 거문도인 그는 피서 겸 낚시나 하려고 방금 ..
[좋은수필]모서리를 매만지다 / 송복련 모서리를 매만지다 / 송복련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이 화를 벌컥 낸다.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것인가. 애써 평온한 척했지만 속은 무던히 끓고 있었나 보다. 이번 명절은 복잡한 심사로 차례를 지내러 가지 못했다. 조상에 대해 면목이 없어 마음이 무겁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한 달 전인가. 큰댁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로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조카가 불쑥 내뱉는 말 한마디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인데 오히려 돌팔매질했다니. 억울하다. 대화를 한답시고 섣불리 나서다간 말이 말을 낳고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일 게 뻔하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불만이 비집고 나오려고 했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더구나 아랫사람이 아닌가. 나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