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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곡선, 그 화려한 유혹 / 한상렬

곡선, 그 화려한 유혹 / 한상렬

 

 

한 마리 백조가 호수 위를 난다. 우수의 깃을 접고 유유히 나래를 친다. 그를 향해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보기에 따라 시화詩化된 영혼의 상징으로 보이는가 하면, 한낱 정욕의 대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백조는 곧잘 여인의 아름다움에 비유된다.

이상李箱이었던가. 여자를 양파에 비유한 작가의 그 달관이 부럽다. 아무리 껍질을 벗겨도 자꾸만 그 내피內皮의 미로가 다하지 않는 육체의 현실. 여인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아무도 그 현주소를 가리키기 쉽지 않다.

겨울철 사무실에서 바야흐로 노변정담이 익어가고 있었다. 어느 직장의 상사가 여직원에게 저녁을 사주겠다고 데리고 다녔다 한다. ​ 처음에는 술집에서 간단히 술을 마셨다. 남자는 운전 때문이라고 여자에게만 술을 권했다. 두 사람이 일어날 즈음에는 양주 한 병을 다 비운 뒤였다. 두 사람은 노래방이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남자는 여직원을 강제로 능욕했다. 여자는 그 뒤로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여관이었다는 이야기. 끝이 아니다. 도망가려는 여자를 남자가 다시 부둥켜안았다. 여자는 목하 결혼 직전. 칠 년이나 사귀는 남자가 있었다나. 남자는 여자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고 돈을 건넸다. 여자는 단박에 뿌리쳤다. 그 후 남자가 직장에서 중징계를 받으리라 생각했으나 가볍게 처리되자, 여자는 그 남자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대충 노변정담의 스토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날의 성토대회는 악덕惡德이 물론 남자 쪽으로 기울었다. 일상적인 도덕률로 보아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다. 그런데 내내 개운치 않았다.

나는 남자는 물론이요, 여자에게까지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남자를 따라가 술을 마시고 그 지경이 되기까지에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 책임은 물론이요, 적어도 백조의 깃을 벗어던진 것이 아니냐?"

이런 나의 항변보다 그때 나는 일본 어느 작가의

"여자는 결혼하고 나면 온전한 아내가 되고 싶어 하지만, 남자들은 절반은 독신으로 있고 싶어 한다. 나머지 절반은 독신의 자유와 유적悠適한 마음 속에 유보해 두고 있다." 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인의 잘못이 크다고 항변하려는 것이 아니다. 윤리성이 전제되지 않은 썩은 육체의 향연을, 그들이 빗는 오늘의 저속한 성애性愛의 탐닉을 말이다.

바야흐로 곡선의 유혹에 빠진 사회다. 오늘 신문 한 면에도 대문짝만 하게 백화점에 놀러 갔다 '덫'에 걸려 성폭행당한 딸의 아버지가 아파트 지하 현장에 보름이나 잠복하여 범인을 직접 붙잡았다는 소식과 나란히 여성상담실이 밝힌 "성폭행 강 건너 불 아니다."라는 머리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인신매매'니, '성폭행'이니 하는 용어가 이제는 전혀 낯선 용어가 아니다. 그래서 딸 가진 부모마다 늦게 귀가하는 딸자식의 밤길을 전전긍긍​한다.

곡선에의 유혹이 빚는 문제화, 이런 유형의 문제는 소설 작품 어디에서나 나타난다.「노틀담의 곱추」에는 한 승정(僧正)이 등장한다. 집시 처녀 에스메랄드를 짝사랑한 나머지 그는 라이벌인 경비대장을 살해한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잠시 정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또 스탕달의「빠르므의 승원」에 나오는 주인공 빠브리스 역시 그렇다. 그는 마침내 사랑하는 여인 아리에따의 정부情夫를 찔러 죽인다. 아내의 부정을 접한 장군 오델로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데스디모나의 목을 쳐 죽인다. 모두가 다 여인을 향한 질투 때문이었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인간은 변모한다. 어떻게 대처하는가는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상황에 눈 뜨지 못하고 엉거주춤 성性에 노예가 되었을 때 인간성은 타락 일보 직전이 된다. 숙명적인 공간 위에 펼쳐지는 삶의 리듬과 그 빛깔들이 있다. 어떻게 하면 주어진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인간들. 그러나 거기 또 한계상황이란 것이 있다. 한 발짝도 더는 그 주어진 울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바로 그 원동력이 돼 있기도 하는 것.

존 파올즈의 「콜렉터」에는 오늘날 창조적 문화인이 겪는 수난의 자국이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다. 콜렉이란 사나이. 신분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란다라는 미모의 여대생을 그는 사랑했다. 가난하고 천한 신분인 그는 우울한 소년기를 벗어나 어느 날 엄청난 행운을 붙잡았다. 축구 복권으로 거액을 만지게 된 그는 런던에서 두 시간쯤 떨어진 곳에 집을 장만했다. 이제 그의 신분이 달라진 것이었다. 그 옛날 비밀 교회로나 사용됐음직한 지하실을 거실로 꾸미고 혼자만의 분위기를 즐기려 했다.

어느 날 그는 미란다를 납치했다. 마치 곤충 채집자들이 채집망을 펴들고 한 마리 곤충을 낚아채듯 짝사랑해 오던 미란다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는 병적 생물 수집광이었다. 음산한 지하실. 유폐된 여인. 나비 채집만이 유일한 취미인 남자의 감시를 받으며 무기한의 ‘갇힌 자유’ 속에서 헤엄쳐야만 하는 안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가 결혼해 줄 것을 강요했지만 그녀는 싸늘하게 거부했다. 참된 인간관계가 싹트기 어렵다는 절망감만을 되씹었다.

여자의 절망은 컸다. 그녀의 기도는 탈출에의 의지와 갈망으로 가득했다. 회유와 설득, 협박,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지만 자유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증오와 모멸밖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는 어쩌면 현대인이면 누구나 쉽사리 겪는 소외감이나 절망을 대변해 주고 있다.

마침내 여자는 섹스로서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 했다. 사내 앞에서 옷을 벗고 알몸으로 모든 완력을 수용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사내는 싸늘하게 외면했다. 이 시대의 창조자들을 향한 폭력의 선언이었던가.

“나는 결코 너의 육체 따위에는 흥미가 없다. 사내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은 창부만이 할 짓이다. 나는 네게서 창부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했던 사내는 짐승처럼 그렇게 울부짖었다.

이윽고 미란다는 절규했다.

“세상의 퓨즈가 끊어져 불이 나간 것과 같다. 나는 여기 깜깜한 진실 속에 있다. 신은 불구가 되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할 수가 없다. 그가 우리를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한다.”

콜렉의 폭력에 그녀는 맞설 수가 없었다. 마침내 햇볕과 공기마저 차단된 지하실 속에서 폐렴으로 죽고 만다.

2차대전 이후 노출되기 시작한 영국 상류사회의 몰락상을 고발한 사회비판적인 작품이다.

여기 미란다의 고뇌가 오늘날 우리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허망한 독선으로 꽉 차 있는 시간을 꿰뚫어 나가려는 인간의 의지. 진정한 인간관계의 개선은 결코 돈과 권력과 섹스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교훈이 하나의 자각증상으로 나타난다.

곡선은 화려한 유혹이다. 성의 개방을 다투어 부르짖는 얄팍한 상술이 빚어내는 아이러니. 백조의 아름다움보다는 관능적 쾌락에 안주하려는 현실에 미란다의 독백이 반향처럼 들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