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모델 / 서은영
여자의 몸은 곡선이다. 부드럽게 흐르는 그 안에 뼈마디 관절이 들어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둥근 아기집을 품고 지아비를 품고 세상마저도 품어내는 여자는 태생부터 곡선이어야 하는 숙명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신비로운 탄생의 공간을 품으며 동그랗게 무엇이든 갈무리하고 밖으로 내색하지 않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여자의 몸, 가히 곡선의 겹침이다.
시도 때도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하던 여중생 때였다. 미술 시간은 시험 기간이나 되어서야 다른 과목들처럼 책을 펼치고 약간의 이론 수업을 했다. 총각 미술 선생님이 ‘누드화란 말이지….’라고 설명하자 나른하던 교실 분위기가 일순간에 긴장감 속으로 빠졌다. 나비 한 쌍만 어울려 날고 있어도 공연스레 얼굴이 붉어지던 우리는 덜 익은 풋사과처럼 ‘푸풋’ 웃으면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드화가 인체의 관능적 미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서양화의 한 장르지만 가슴에 욱신대던 멍울 앓이가 미처 끝나지 않은 소녀들에겐 수줍음의 대상일 뿐 쉽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또한 누드화를 경험하던 날의 부끄러움을 풀어 놓으셨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을 갓 벗어난 미대 1학년 첫 누드 데생 시간이었다. 실기실 가운데를 비워두고 이젤을 펼친 채 둥글게 둘러앉아 무언지 모를 기대감에 젖어 모델을 기다렸다. 설렘과 긴장, 그리고 쑥스러움이 계속 반복되는데 마침내 모델이 가운데 대(臺) 위에 섰다. 마치 동상 제막식의 가림 막을 걷어내듯 모델이 가운을 내렸다. 말 그대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순간의 정적 속에 공기 입자들의 움직임이 다 들리는 듯했다. 도화지를 스치는 연필 소리와 삐걱거리는 의자만이 천둥소리처럼 꾸릉거렸다. 미대입시를 위해 수없이 스케치했던 석고상과는 달랐다. 체온을 품고 있는 것의 파장은 맞닿지 않아도 전달되는 온기가 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디를 봐야할지, 오래 들여다보면 안 될 것 같아 이젤에 코를 파묻고 상상화처럼 둥그렇게, 둥그렇게 곡선만 그렸다.
모델은 고정된 자세를 취해야 하므로 중간 휴식시간이 꼭 필요하다. 쉬는 시간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모델을 찾아 밖으로 나가보니 모델이 평상복을 걸친 채 봄날 교정에 새순 오른 쑥을 캐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고향에 있는 누이같이 순수해서 모두 함께 쑥을 뜯고 그 쑥으로 쑥떡을 해서 나눠 먹었다.
“단지 모델이었을 뿐인데…. 그 앞에서 한없이 움츠린 것은 온전히 내 부끄러운 생각 때문이었어.”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 어린 마음의 어디에 가 닿았는지 오래 각인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지 기억에 없지만 여신이 등장하는 신화처럼 몽롱한 이미지는 잊히지 않고 더러 생각났다.
어른이 되면 더욱 확실히 알게 된다. 체험이 보다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모든 여체는 끝끝내 아름다운 곡선을 유지하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내 몸이나 대중목욕탕에서 보는 여자의 몸은 ‘여체’라기보다는 두툼한 ‘육신’이다. 세월을 짊어지고 걸어 곱은 등의 곡선이나 삶의 비탈을 오르느라 휘어진 다리는 선뜻 아름답다고 말할 수가 없다. 출산을 마친 여자의 몸은 이제 더는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서를 받은 듯 긴장감을 놓아버린 완만함으로 한여름의 전깃줄을 연상시킨다.
마흔을 넘긴 나에게도 느슨하고 나른한 곡선들이 찾아와 일상을 공유한다. 그날 선생님의 첫 체험처럼 나도 비슷한 시간을 경험했다. 취미로 배우던 사진반에서 풍경과 정물을 지나 인물을 오브제로 삼게 되었다. 누드 촬영은 경험할 만큼 세상을 겪어본 내게도 수선스럽기만 한 사건이었다. 목욕탕이 아닌 곳에서 같은 여자의 알몸을 본다니 얼마나 낯선 경험이란 말인가. 카메라 렌즈로 내 표정을 감출 수 있다손 쳐도 민망스러울 것이 뻔했다.
하지만 설렘 또한 그만큼의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내가 어느 순간 놓쳐버렸을 여체의 가장 눈부신 곡선을 찰나에 표현할 수 있다는 설렘이었다. 경쾌하게, 시비 걸듯 도드라진 엉덩이의 곡선, 중심으로 솟구쳐 회오리치는 가슴의 등고선, 물에 뜬 복숭아 살결 같은 선홍의 색감, 물결치듯 흘러내린 풍만한 곡선을 렌즈 속으로 품기 위한 숭고한 시간이겠다. 사진 한 컷에 뭇 사내가 여체의 등을 쓸어 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싶기도 하다. 코 박고 동그라미만 그려대던 미술 선생님의 그날처럼 설레기로 하자. 여중생의 그 몽롱한 무엇이 무엇인지를 이번에는 알아야겠다며 카메라를 닦았다.
“모델 준비하게요.”
강사님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벤치에 앉아 있던 20대 젊은 여자가 망설임 없이 외투를 벗는다. 굽 높은 구두 한 켤레만 걸쳤다. 미리 준비된 조각상 옆에 붉은 피가 도는 움직이는 조각상이 되어 연신 포즈를 취한다. 백여 대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동시에 터진다. 수만 마리 철새가 일제히 날개를 치며 수면을 비상하는 듯하다. 머리채를 들어 올리는 팔의 곡선이 충분히 시선을 거느리기를 기다렸다가 움푹 팬 등의 그림자를 펼쳐 보인다. 열쇠 구멍을 통해 몰래 엿보는 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여 관음증 여자처럼 혼자만의 포즈를 취한다. 포즈 따라 셔터 소리도 요란하다.
몸이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면 한창 생기 넘치는 그녀는 싱그러운 꽃과 섬세한 나비가 유약 위를 나는 영국 도자기다. 나무에 기대면 나뭇잎이 되고 바위 위에 앉으면 날갯짓을 멈추고 쉬는 잠자리가 된다. 인공의 것을 하나도 걸치지 않는 나신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온몸으로 주장하는 것만 같다.
잠시의 휴식,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면서 나는 몇 마디에 단단하던 편견과 알려하지 않아서 알지 못한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여전히 옷을 벗을 때는 수치스러워요. 그런데 진지한 눈빛이나 카메라 앞에 서면 치욕감은 사라져요. 한창 몰입하다 보면 저절로 배경의 일부가 됩니다. 단순한 맨몸만 표현하는 게 아니라 몸에 정신을 담아야 천박한 외설로 흐르지 않죠. 내면 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감이에요. 아무리 예쁜 몸매를 가졌더라도 자신감이 없으면 누드모델 할 수 없어요. 제 블로그에 놀러 와 보세요.”
세상을 보는 시각은 타고난 천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살면서 겪고 느낀 만큼 보는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귀가 시간이 엄했던 가정에서 자란 나는 솔직히 ‘누드모델’이 예술을 완성하는 조력자라는 생각을 갖지 못했다. 오히려 외설스럽고 선정적인 알몸의 작업자쯤으로 여겼다. 알몸으로도 당당히 그녀의 지론 앞에서 겹겹이 껴입은 우둔한 내 사고가 발가벗겨졌다.
다시 촬영을 시작하자 곡선을 조율하는지 모델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이른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이 서서히 나신을 어루만진다. 자연 속에서 더욱, 신비로운 색감을 발하는 그녀의 곡선 위로 카메라 셔터가 터진다. 빛이 그녀의 음영을 밀고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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