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꼬집힌 풋사랑 / 서영화 꼬집힌 풋사랑 / 서영화 옛 노래가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온다. 오래된 엘피판에서 가끔 듣는 남인수의 ‘꼬집힌 풋사랑’이다.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옛날 장안의 기생 중에는 ‘꼬집힌 풋사랑’을 듣고서 자신의 신세에 빗대어 자살하려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하니 노래가 남인수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꼬집힌 풋사랑’을 들으니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겨울방학 때였다. 우리 집에 가끔 해가 질 무렵에 오셔서 술을 자신 후 밤늦게 가시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추레한 작업복을 입고서 올 때마다 소주를 두 병들고 오셨다. 선친과 순배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거나, 늦으면 함께 주무시고 새벽바람 따라 일터에 가셨다. 어느 날, 아저씨가 나에게 속에 탈이 나서 병.. [좋은수필]비상 / 류영택 비상 / 류영택 새끼뿔논병아리가 앙탈을 부린다. 어미는 자신의 주위를 빙빙 맴도는 새끼가 귀찮다는 듯 날개를 편다. 깃털을 부풀려 겁을 주지만 새끼는 쉬이 물러나지 않는다. 어미는 새끼를 향해 부리를 곧추세운다. 손가락으로 항문에 똥침을 가하듯 어미뿔논병아리는 부리로 새끼의 엉덩이를 쫓는다. 놀란 새끼는 어설픈 날갯짓을 하며 수면 위를 내달린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짝짓기 계절이 다가오자 뿔논병아리 수놈들의 신경이 날카롭다. 암놈을 두고 매일 같이 싸움을 벌인다. 연적을 물리쳐도 또 다른 장애물이 있다. 정작 암놈이 접근을 허락지 않는다. 수놈은 몇 날 며칠 동안 암놈의 주위를 맴돈다. 그러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힌다. 이제 수놈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 암놈의 행동이 다소 느긋해 보인다.. [좋은수필]보물찾기 / 김창애 보물찾기 / 김창애 살아오면서 행운과는 지독히도 인연이 없었다. 하다못해 동네 마트에서의 사은 경품 행사나 지역 축제의 행운권 추첨에서조차도 화장지 한 롤 당첨되어 본 적이 없다. 어쩜 그리도 내 번호는 잘 비켜가는지 애초에 나는 행운이라는 것과는 인연이 없겠거니 포기하며 아예 시도조차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면 오후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보물찾기가 있었다. 기억하건대 나는 단 한 번도 보물을 찾은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요즘 보물 창고를 발견했다. 보물은 필요에 따라 하나씩 찾아온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매일매일 보물을 만난다. 어제는 오래된 막대 저울을 찾아냈다. 3층 옥탑방에서였다. 그곳은 시어머니의 창고다. 시어머니는 생활 전번에 필요한 모든 것을 .. [좋은수필]사주 / 이숙희 사주 / 이숙희 잠결에 화들짝 눈을 뜬다. 고통에 짓눌린 듯한 남편의 신음소리 때문이다. 나의 부스럭거림에도 남편은 기척이 없다. 꿈인가?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다. 평소의 코 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코밑에 손등을 대어보고 가슴에 귀를 대어보아도 아무 느낌이 없다. 남편을 흔든다. 그제야 남편은 "왜 그래?" 하며 돌아누워 계속 잠을 이어간다. 신혼 초의 일이었다.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승복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한참 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부모는 나를 낳았으되 나를 키워주지 못하고…….”로 시작하여 조실부모한 남편의 사주를 줄줄 뱉어내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금세 남편의 사주임을 알 수 있는 것을 나의 얼굴에서 읽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했다. 누가.. [좋은수필]둥지 / 김희자 둥지 / 김희자 평소보다 곱절이나 걸려 당도한 고향이다. 고향은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층계를 이룬 다랑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향 특유의 흙냄새는 예나 지금이나 오감을 자극한다. 옛 둥지를 찾는 새인 양 마을 길을 들어 낯익은 문패 앞에 섰다. 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버선발로 뛰쳐나온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다림에 젖어있다. 품에서 흩어졌던 식솔들이 둥지를 틀고 찾아든 고향집이다. 매양 그립던 피붙이들은 정이 곰살갑다. 남편과 나란히 부모님께 세배를 올리자 그 뒤로 두 딸이 따른다. 쌈지를 나온 세뱃돈에서 곰삭은 사랑과 끈끈한 정이 묻어난다. 마당에는 숯불구이 준비로 분주하다. 지난가을 아궁이에게 구워낸 숯이 화기를 토한다. 숯의 열기는 부모.. [좋은수필]문 / 김양희 문 / 김양희 문門을 열어보니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그게 이승과의 마지막이었다. 세상과의 연緣을 문 하나 사이로 마감한 것이다. 숨지기 전 자식들이 저 문을 열어주기를 엄마는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문은 세상과의 소통이요 자신을 열어 보이는 통로였다. 열림은 오는 것이요, 닫힘은 가는 것이다. 열린 문은 닫히게 마련이듯이 온 사람 또한 반드시 가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문은 인생이요 작별이요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은 마지막이 아니요 시작이다. 더러는 입시의 문을 통해 청운을 꿈꾸기도 하고, 인과의 연을 통해 배필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짝을 만나 생활의 이삭들을 빨리 거두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학문이나 환경, 운명 때문에 늦게서야 가정을 꾸리는 이들도 있다. 사람은 .. [좋은수필]연지회상蓮池會上 / 조이섭 연지회상蓮池會上 / 조이섭 송곡 삼거리에서 도리사 방향으로 접어든다.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라는 기다란 현판을 건 일주문이 두 팔 벌려 반긴다. 5km 남짓 더 달려 가파른 된비알을 오른 후에야 태조산 중턱에 자리한 도리사에 도착했다. 여느 절 정갈한 돌담 대신 빨갛게 물든 담쟁이 옷을 걸친 석축이 아스라하게 높다. 그 옛날 어느 겨울날 냉산의 꼭두 비탈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고, 아도화상이 신라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를 지었다. 이차돈이 우윳빛 피를 흘리기 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석축을 돌아들어 서대에 오른다. 아도화상이 “저곳에 절을 지으면 불교가 흥할 것이다.”라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는 곳이다. 망망 무애 해평들과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너머 황악산 어림에 눈길.. [좋은수필]시간에 대하여 / 정태헌 시간에 대하여 / 정태헌 뒤엉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는 순간마다 흘러가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되짚으면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머뭇거리며 지나가며, 과거는 영원히 정지한 채 침묵 속에 맴돌 뿐이다. 그 시간의 앞뒤가 뒤섞여 종종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헷갈리곤 한다. 그럴 때면 허방에 빠진 것만 같고, 실꾸리가 엉클어진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일전 길거리에서 만난 지인과의 대화가 아득하기만 하다. 서로 안부를 묻다가 돌아가신 모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벌써 가신지 1년도 지났단다. 아니, 달포 전쯤이 아닌가. 아 참,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작년 봄 벚꽃 흐드러지게 핀 날 강변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그 장례식장에 갔었지. 그래, 망자의 영정을 등 뒤에.. 이전 1 ··· 3 4 5 6 7 8 9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