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청산도에서 / 박기옥 청산도에서 / 박기옥 여행에도 운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나는 청산도행을 두 번이나 실패했다. 날씨 때문에 완도항에서 배가 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새벽 일찍 출발해서 무려 5시간을 달려갔던 곳이었다. 일행은 여객 터미널 주변을 뭉그적거리다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운 좋게도 무사히 배가 떴다. 40여 분의 항해 끝에 청산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찌할까. 어처구니없게도 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모질게 다쳤던지 무릎이 순식간에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인대 파열이었다. 졸지에 섬에서 깁스를 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섬은 언제나 바람에 머물러 있었다. 뭍의 날씨가 여름을 재촉할 때도 섬은 아직 꽃샘바람을 벗어나지 못했다. 파도는 바위를 끌어안은 채 아이처럼 보채는데 무심한 유.. [좋은수필]선풍기 / 목성균 선풍기 / 목성균 처서가 지났다. 그늘에서는 더 이상 바람이 필요 없으니 올여름도 다 갔다. 언제부터인지 선풍기가 거실 구석으로 밀려나서 한가하게 쉬고 있다. 소임을 잃은 선풍기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바람개비를 감싸고 있는 안전망이 군데군데 도장이 벗겨져 녹이 슬었고, 눈처럼 하얗던 플라스틱 몸체는 빛이 바래서 누렇다. 막내 진국이를 낳고 산 선풍기다. 진국이 나이 스물일곱 살이니깐 선풍기 나이도 스물일곱 살이다. 기계의 나이치곤 고령이다. 선풍기가 우리 집 형편을 돕느라고 무병장수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마운 생각이 든다. 진국이는 복지경에 태어났다. 산모가 세 이레를 지났는데도 원기를 못 찾고 땀을 줄줄 흘리면서 헐떡거렸다. 갓난 것 이마에도 땀띠가 송골송골했다. 우리는 달동네 서향 문간방에 세.. [좋은수필]고수 / 이상렬 고수 / 이상렬 배드민턴장 앞, 여중생 두 명이 서성인다. “왜, 민턴 배우게?” “친구 소개로 왔어요, 오늘 여기서 쳐도 돼요?” 당돌한 말투에다 낯선 곳에 대한 경계와 호기심 어린 눈, 스포츠백도 아닌 책가방에 라켓 두 자루를 꽂은 엉뚱한 폼으로 보아 이제 막 배우려는 학생들 같았다. 대개, 민턴은 운동장 한 귀퉁이나 동네 놀이터에서 가볍게 치고 노는 놀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실내 코트까지 찾아오는 걸 보면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아니겠는가. 딱 3개월 전 내가 이랬다. 나의 민턴 입문기는 이러하다. 불청객처럼 남성 갱년기가 찾아왔다.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닥으로 추락했고, 몸은 무력해졌다. 뭐라도 시작해야겠다고 한 것이 민턴이었다. 이유는 그냥‘그깟 것'이 쉬워 보여서다. 살면서 .. [좋은수필]갇히다 / 김은주 갇히다 / 김은주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밥그릇에 고봉으로 복사꽃을 그려 놓은 작가의 작품 앞에서 쌀도 아닌 꽃이 밥그릇에 담겨 저토록 풍성하고 그득할 수 있을까? 한참 생각해 보다가 막 돌아서 나오는 길이었다. 분홍의 꽃 밥에 취해 뱃속에 그득한 포만감이 밀려오고 따뜻한 그림의 색감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어둑한 화장실 안은 눈길 줄 새도 없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작품들만 눈부시게 돌아보다 나오는 길이었다. 두어 걸음 지나쳐 오다가 푸른 조명이 하도 강렬해 다시 돌아가 화장실 안을 들여다봤다. 푸르스름한 어둠 안에 혼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불현듯 만난 것이다. 보자마자 내 발길은 얼어붙었고 한참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러고 서 있었다. 지방에서는 처음 열리는 호텔 아트페어에 혹 잡지 기삿거리가 있나 하.. [좋은수필]아버지의 쇠메 / 조이섭 아버지의 쇠메 / 조이섭 지난해는 장마가 유난을 떨었다. 때 늦은 가을 태풍까지 기승을 부렸다. 고향 강변에서 과수 농사를 짓는 사촌 형님 집에 인사차 들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헛간 구석에 서 있는 녹슨 쇠메가 장히 눈에 익었다. 그 옛날 아버지께서 쓰시던 쇠메였다. 아버지는 소싯적, 남의 집 사과밭에서 일할 때 당신 과수원을 가져보겠다던 소망을 이루려고 고향에 토지를 장만했다. 농기구를 사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 고령 오일장에 갔던 날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대장간에 들어서자, 우선 낫과 호미를 집어 들었다. 낫을 만지면서 허연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두엄더미를 상상하고, 호미를 들고는 헛간에 수북이 쌓인 감자 무더기를 생각하는 듯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좋은수필]게 / 김용준 게 / 김용준 정소남이란 사람이 난초를 그리는데 반드시 그 뿌리를 흙에 묻지 아니하니 타족에게 짓밟힌 땅에 개결(慨潔)한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함이란다. 붓에 먹을 찍어 종이에 환을 친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노릇이리오마는 사물의 형용을 방불케 하는 것만으로 장기(長技)로 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빌어 작가의 청고(淸高)한 심경을 호소하는 한 방편으로 삼는다는 데서 비로소 환이 예술로 등장할 수 있고 예술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사람이 일생을 거의 3분의 2나 살아온 처지에 아직까지 나 자신이 환장인지 예술가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딱하고도 슬픈 내 개인 사정이거니와 되든 안 되든 그래도 예술가답게 살아 보다가 죽자고 내 딴엔 굳은 결심을 한 지도 이미 오래다.. [좋은수필]통연(痛緣) / 최해숙 통연(痛緣) / 최해숙 길을 가다 보면 소도 보고 중도 본다. 눈도 맞고 비도 맞는다. 밝은 대로를 걸을 때도 있고, 칠흑의 오솔길을 걸을 때도 있다. 일 년 열두 달, 삼백예순 날이 한결같을 수 없듯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만 기대할 수 없는 게 세상살이다. 생의 절반을 살면서 음으로 양으로 터득한 결론이다. 터득이 곧 득도라도 되는 양 흔들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턱도 없는 자만이었다. 난데없이 덮어쓴 흙탕물 때문에 이리 마음이 출렁이는 것을…. 십여 년 전, 우연한 인연으로 어느 문학단체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글 한 줄 못 쓰지만 출석만은 꼬박꼬박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매사 야물지 못한 내겐 그것도 대단한 결심이었다. 사람 사는 일이 그렇듯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처음 먹은 마음 변치 않.. [좋은수필]페르소나 / 송복련 페르소나 / 송복련 맞은편 여자가 화장을 한다. 콤펙트를 열어 분첩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잡티를 지워간다. 고개까지 쳐들고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어루만지는 손길이 섬세하다. 눈썹연필을 꺼내들고 부챗살처럼 펼쳐진 속눈썹 위로 라인을 그린 뒤 화장 도구들을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는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일까. 지하철 안에서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거나 책을 읽든지 공상을 하지 않는다면 딱히 할 일이 없다. 시선을 둘 곳이 마땅찮은 사람들은 무심한 듯 심각한 듯, 졸음에 겨워하며 무료함을 견딘다. 정물처럼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 속에 색다른 몸짓이나 차림은 시선을 끌기 십상이다. 가끔씩 보는 이런 광경에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간다. 집에서나 마쳐야할 그 여성스러움을 배반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 이전 1 ··· 6 7 8 9 10 11 12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