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택배 안테나 / 김상영 택배 안테나 / 김상영 소싯적 우리 집에 금성 라디오가 있었다. 굵직한 건전지 여러 알로 작동하였는데 아껴 쓸 양이면 녹물이 번져 알통이 지저분하였다. 우리나라 전자 기술이 일천할 때였다. 박정희 시대의 혁명 뉴스, 재치문답, 법창야화 등에 귀를 세웠으며 하루라도 연속극을 건너뛰면 어찌 돼가나 궁금하여 좀이 쑤시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한번은 뒷집의 앙증맞은 일제 라디오와 자웅을 겨룬 일이 있었다. 두 라디오를 같은 방송 주파수에 맞춘 다음 가까이 대서 소리가 죽는 놈이 지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성능 좋은 일제에 소리를 빼앗긴 우리 라디오는 멍청해져 버렸다. 어른들은 시쳇말로 ‘석’이 많은 일제가 전파를 강하게 당긴 탓이라며 체념한 성싶었다. 모르긴 했지만 나도 일제의 트랜지스터가 옹골찬 데다 그 수.. [좋은수필]싸리나무 / 채정순 싸리나무 / 채정순 딸이 네 살짜리 외손자의 밥상머리 버릇을 고친다고 야단이다. 회초리가 소나기처럼 지나간 아이의 종아리가 지렁이가 붙은 형국이다. 맞은 곳을 어루만지며 흐느끼는 어린 것이 측은해 훌렁훌렁 충동 등반을 한다. 더욱이 세탁소용 철사 옷걸이가 회초리가 되었기에 내속이 다 터져 나와 거실을 돌아다녔다. 여린 체온을 묻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궁색한 매를 쓰레기통에 꾸겨 넣고는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씩씩거리는 내 숨결과 잦아지던 아이 울음소리도 슬며시 따라붙는다. 비육 병자가 고기를 찾듯이 건강을 위해 한 번씩 산을 타는 나지만 속이 상하거나 문젯거리가 생기면 팔자에 없는 산행을 한다. 산이 베푸는 점이 많으니 본능이 먼저 알고 무의식을 발로 시킨다. 산위에 서면 호기가 생기고 맑은 공.. [좋은수필]이름 유감 / 조일희 이름 유감 / 조일희 선남선녀가 웃고 있는 모바일 청첩장이 도착했다. 사진 아래 적힌 신부 어머니 이름이 평소 부르던 친구 이름이 아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촌스러운 본명을 그대로 쓰려니 창피하더란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번 참에 바꿨다며 전화기 속 ‘금자’가 깔깔 웃는다. 근래 들어 개명한 친구가 여럿이다. 주로 ㅇ순, ㅇ자, ㅇ옥으로 불리던 친구들이다. 한데 바뀐 이름 거개가 부자연스럽고 낯설다. 주름진 얼굴에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은 멋따기꾼 같아서이다. 오래 불러 편안한 이름 대신 흠치르르한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정든 연인과 헤어진 것 마냥 섭섭한 마음이 든다. 또 세련되게 바뀐 이름은 설익은 보리밥처럼 입안에서 겉돌 뿐 쉬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나 어쩌랴, 정.. [좋은수필]접목 / 배형호 접목 / 배형호 들판은 온통 비닐하우스 천지다. 겨울바람에 떠는 비닐이 차를 따라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간다. 고향 가는 길은 강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아치형 구조물이 고향으로 오는 손님을 반긴다. 도로를 가로지른 구조물에는 찬 계절인데도 노란 참외가 달려있어 이곳이 참외 주산지임을 알린다. 이곳을 지날 적마다 흥부의 박보다 더 크게 그려진 잘 익은 참외를 보며 농부와 참외의 인고의 세월을 생각해 본다. 나도 참외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다. 당시에 친구와 고향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저녁이면 지서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하는 야간 방위 근무였다. 친구와 돌아오는 봄에 참외농사를 짓기로 계획을 세웠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경운기를 몰고 야간 근무를 위해 출발했다. 눈보라 속을 달려가.. [좋은수필]공존의 이유 / 이윤경 공존의 이유 / 이윤경 얼마 전부터 집주변에서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낯선 움직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평소와는 달리 집을 든들 때마다 예민해졌고 조심스러워졌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게 되고 계단을 오르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침 일찍 퇴근을 하는 참에 기필코 흔적을 찾아내어 그 불안의 실체를 밝히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계단 구석구석, 지하주차장, 창문 너머까지 세심하게 훑어가면서 4층까지 오르는 동안은 특이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끝에서 무언가 희미한 소리와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곳은 볕이 하루 종일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라 나는 가끔씩 식탁의자를 들고 올라와 책을 보기도 하고 옥상으로 내다보이는 먼.. [좋은수필]사랑길 / 박월수 사랑길 / 박월수 소리 내지 않는 마루를 본다. 솟을대문 높다란 송소고택 큰 사랑채에 딸린 툇마루는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쪽문쯤에서 안채 바람벽으로 이어지는 툇마루는 두께가 유난하다. 사랑채에 기거하던 바깥양반이 안채로 밤 나들이 가던 길이란다. 모르긴 해도 가슴이 꽤나 두근거렸을 아름다운 길이다. 아랫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 부러 그리 만들었단다. 이슥한 밤 사랑채의 툇마루 밟는 소리를 체통을 흐려놓는 소리로 여겼던 옛 양반이 측은해진다. 아흔아홉 칸 저택에서 많은 식솔을 호령하던 양반에게도 드러내 놓고 사랑하는 일만은 허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의 눈을 피해 아내마저 은밀하게 만나야 했던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한 집에 살면서도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마음은 애틋하고 절절했을 게다. 하나 .. [좋은수필]이명耳鳴 / 김종완 이명耳鳴 / 김종완 살아 계실 적에 어머님은 귀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몇 번 진찰을 받으셨으나 의사는 노화에 따른 현상이므로 특별한 치료책이 있을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어머님은 저승까지 그 귀찮은 소리를 갖고 가셨다. 그런데 나에게도 얼마 전부터 이명이 찾아왔다. I.M.F 사태는 학원업을 하는 나 같은 영세 사업자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형편상 직원 수를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공백을 메꾸는 일은 원장인 내 몫이 되었다. 하루 10시간이 넘은 과로가 계속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밀린 원고와 새벽까지 씨름을 했다. 사십 중반을 넘긴 체력은 옛같지 않았다. 한참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지러움증이 기습을 했다. 팽-. 중심이 흐트러지며 맥없이 옆으로 쓰러져가는 몸을 반.. [좋은수필]이판사판(理判事判) / 홍혜랑 이판사판(理判事判) / 홍혜랑 산사(山寺)의 겨울밤을 어찌 어둡다 하리.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선명하면 할수록 더 멀리 느껴지는 건 색다른 체험이었다. 멀리 있을수록 그리움이 더한 것이 어찌 별뿐일까. 고개를 하늘로 젖히니 걷잡을 수 없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몸을 방어할 길이 없다. 별이 나를 마구 잡아당긴다. 살갗에 닿는 청량한 대기 또한 어둠을 씻을 만큼 상쾌하다. 이 무명(無明)의 영혼에게도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이번 문화유적 답사팀이 숙소를 호텔이나 콘도 대신 절간의 선방(禪房)으로 정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별들과의 만남도 소중했지만 잠시 방문한 과객(過客)들에게 법문을 허락한 주지스님과의 인연이 있어 이번 여행이 더욱 기억에 남아 있는 듯하다. 일행 중에는 나를 ..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