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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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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나비의 무게 / 김이랑 나비의 무게 / 김이랑 누구의 영혼일까. 날개 한 겹이 풀잎처럼 하늘거린다. 나는 붓이라는 듯 허공에 나붓나붓 휘갈기는 날갯짓, 그 초서草書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필법이라, 필시 영혼이 자유로운 족속이겠다. 중력은 무게를 가진 것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은 그래서 살을 빼고 뼈를 깎는데 대대로 생을 바쳤으니, 그것이 날짐승이다. 하지만 날짐승이라고 부르기에는 춤사위가 현란하고 허공을 배회하는 한낱 벌레라고 보기에는 무늬가 신비로우니, 아마 다른 차원에서 온 영혼이 아닐까 싶다. 나비, 이름에 받침이 없는 그는 꽃에서 꽃으로 건너뛰는 게 일상인데, 향기로운 삶으로 보아 그만한 귀족이 세상에 없지 싶다. 나풀·나풀 허공에 피었다 지는 데칼코마니에 무엇이 있지 않고서야, 가볍지만, 시작..
[좋은수필]다듬이 소리 / 최은정 다듬이 소리 / 최은정 슬하에 육 형제를 둔 시어머님께서는 그 엄청난 빨래감을 혼자서 해내셨다. 내게 힘든 일은 안 시켰지만 푸새질만은 반드시 내가 시어머님 옆에 있어야 했다. 이불 홑니는 흰 옥양목이 으뜸이다. 봄 풀은 누그럼해야 되고, 여름 풀은 세어야 하고, 가을 풀은 개가 핥기만 해도 빳빳해진다고 한다. 푸새질 날은 앞줄 뒷줄 흰 흩니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알맞게 마른 빨래를 넓은 대청으로 걷어 와, 빨래보를 깔고 잔손질을 한다. 솔기를 펴고, 실밥을 뜯어내고, 네 귀를 맞춰 둘로 접는다. 그것을 다시 접어들고 어머니와 나는 줄어든 홑니를 양쪽에서 잡아당긴다. 살짝살짝, 뒤로 넘어지듯 잡아야지 내 손에서 빨래를 놓치면 어머니가 뒤로 넘어지시고, 너무 세게 잡아당기면 앞으로 넘어진다. 그..
[좋은수필]슬러 / 김옥한 슬러 / 김옥한 소년 가수가 흘러간 옛 노래를 구성지게 부른다. 어린 나이에 무슨 한이 그리 많은지 절절함을 토해내는 감성에 원곡 가수도 눈물을 훔친다. 이십 대 중반 청년의 구수하면서 타고난 꺾기 창법은 눈을 감고 들으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고음으로 올라가는 부분에서는 마치 드론이 계곡을 누비듯 시원스럽다. 슬러는 음 높이가 다른 둘 이상의 음표에 긋는 선으로 음과 음 사이를 매끄럽게 잇는 부호이다. 이음줄이나 연결선이라 할 수 있다. 가수에 따라 물 흐르듯 감미롭게 부르기도 하고, 바이브레이션과 꺾기로 긴장감 있게 애간장을 녹이기도 한다. 마치 어름사니가 외줄 위에서 공중으로 확 솟구치다가 떨어지듯 하면서 줄 위에서 사뿐히 내려앉는 것 같다. 트롯 열풍이 불고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뽕짝이라 수..
[좋은수필]돈 / 최민자 돈 / 최민자 사내가 사정없이 내 몸을 주무른다. 어깨며 목이며 등줄기 요소요소에 숨어 있는 경혈을 침을 놓듯 콕콕 잘도 찾아 누른다. 절묘하게 파고드는 찌릿찌릿한 통각. 아악, 소리를 속으로 삼킨다. "아프세요?" "갠차나요?" 사내가 짧은 우리말로 묻는다. 곤장을 맞는 자세로 엎드려 있는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땅딸하고 촌스러웠던가. 어깨가 벌어지고 우락부락했던가. 상관없다. 몸에서 몸으로 전해오는 에너지, 살아 있음의 고苦와 쾌快를 동시에 통감케 하는 손기술만이 그와 나의 접점일 뿐이니. 젊은 날 축첩을 많이 한 남정네가 말년에는 음식 잘하는 여인 하나만 데리고 산다 하듯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데가 많은 나는 구석구석 시원하게 주물러주는 손맛 매운 사내가 제일 반갑다. "돌아누세요." 그..
[좋은수필]하루살이 / 최현숙 하루살이 / 최현숙 하루살이 떼가 극성이다. 더위를 달래고자 나선 걸음이 강변에 가 닿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몰려든다. 날벌레들 등쌀에 문밖 나서기가 무서운 계절이다. 무얼 바라보고 저렇게 열심히 날고 있는 것일까. 팔을 휘저으며 날것들을 쫓다가 그 사람을 생각한다. 자신에게로 쏠리는 눈총에 죄 없이 주눅 들던 남자다. 그를 만난 것은 죽은 사과나무를 뽑아낸 자리에 새 묘목을 심던 날이었다. 저런 일꾼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게 나무를 매만지는 손길이 정성스럽고도 재발랐다. 농사는 물론 집 짓기에 동물 사육까지 무슨 일이든 따를 자가 없다는 젊은이였다. 몸 아끼지 않고 해내는 일의 양이 다른 인부들의 두 몫은 됨직했으니 누구라도 눈독 들일 상일꾼이었다. 자그맣고 마른 몸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좋은수필]고추장 / 노혜숙 고추장 / 노혜숙 해마다 해온 일이지만 고추장을 담그기는 그리 쉽지 않다. 담글 때마다 긴장이 된다. 간이 적당한가 싶으면 너무 달기도 하고, 단맛이 적당하다 싶으면 묽어서 속이 상하기도 한다. 감칠맛 나는 맛 좋은 고추장을 담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정성,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올해는 정말 맛있는 고추장을 담아 보겠다고 벼르며, 가을에 맏물 고추를 사고, 고추장 잘 담기로 소문난 분의 비법을 메모해 놓았다. 늘 사용하던 물엿 대신 이번에는 조청을 만들었다. 곱게 빻은 고춧가루에다 메줏가루를 좀 섞고 조청으로 농도를 조절하고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맞추었다. 신접살림을 났을 때였다. 옆방과 부엌을 같이 쓰도록 되어있는 셋방이었다. 옆방에는 양장점을 하는 내외와 딸 경아가 살고 있었다. 두 집에서 같은 ..
[좋은수필]일흔, 나 / 허창옥 일흔, 나 / 허창옥 연수교육 중이다. 오디토리움이라는 대형 공간에서 천팔백여 명의 회원이 강의를 듣는다. 오전 아홉 시에 길게 줄을 서서 등록을 하고, 열 시에 시작해서 오우 다섯 시쯤에 끝난다. 여기 모여 앉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거의 꼭대기라 할 수 있는 선배다. 일흔, 나. 현역이다. 첫 시간의 주제가 ‘2형 당뇨병’이다. 나의 친애하는 30년 지기 친구 2형 당뇨병. 귀를 바짝 세우고 듣는다. 대학교수의 강의는 매우 학술적이나 내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화면에 비치는 췌장이나 간의 모형들과 도표, 원어들이 흐릿하다. 백내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 내 탓이다. 앞자리 친구들, 옆자리 후배 다 졸고 있다. 몇 가지 건강식품이, 넘치게 건강한 강사의 격정적인 강의로 소개된다. 무심하게..
[좋은수필]설록을 찾으러 / 박양근 설록을 찾으러 / 박양근 비가 내리는 날에 겨울을 생각한다. 벚꽃이 난분분하게 떨어지고 아까시 향이 휘돌리는 길에 서서 설원을 상상한다. 먹장구름 아래로 빗줄기가 내리꽂히는 여름날에는 뺨을 갈기던 눈보라를 기억한다. 계절은 눈과 비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억과 소망으로 갈라지는 시간임을 매번 깨닫기 때문이다. 겨울의 그곳에는 언제나 눈이 내렸다. 내가 도착한 후 달포가 지나도록 눈은 그치지 않았다. 들판을 가득 채운 겨울눈은 4월이 지나도 녹을 줄을 몰랐다. 푸른 초원과 백설로 뒤덮인 지붕과 가을걷이가 끝난 황색의 옥수수밭은 겨울 수채화를 이루었다. 설국. 그곳을 찾아간 까닭은 눈의 나라여서다.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지 피로가 쌓인 탓인지 몸살까지 났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