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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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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쌀독 / 류영택 쌀독 / 류영택 자명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빨리 일어나 밥을 지어야지 마음을 먹어보지만 마음같이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눈까풀이 따갑고 몸도 천근만근이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어떻게 가게를 꾸려가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이 돼서 잠이 든 모양이다. 나는 주방을 서성였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밤새 생각을 정리해뒀지만 갓 시집온 새댁처럼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나는 쌀을 안치기 위해 바가지를 들고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한쪽 벽에 놓여 있는 쌀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핏 웃음이 났다. 내가 너무 긴장해서 그런 건가. 늘 그 자리에 놓여 있었건만 눈을 부라리고 쌀독을 찾아야만 했던 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쌀독은 오랫동안 어머니가 썼던 독이다. 아내는 한동안 ..
[좋은수필]글과 나 / 최민자 글과 나 / 최민자 글은 사람이다. 깜냥대로 쓴다. 섬세한 사람은 섬세하게 쓰고 묵직한 사람은 묵직하게 쓴다. 제 몸뚱이를 척도尺度로 세상을 재는 자벌레처럼 글이 사람을 넘어설 수는 없다. 몸 속 어디 침침한 곳에 미분화된 채 고여 있는 생각들, 강고한 존재감으로 물질성을 획득한 기억과 상념들을 색출하고 용출해 방출해내는 작업이 글쓰기이다. 한 삼태기의 꽃잎을 쥐어 짜 한 방울의 향료를 추출해 내는 일처럼 몸 안에 스민 생각들을 걸러내 활자화하는 공정도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사진이 이미지의 물질화라면 글은 영혼의 지문 같은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한 것, 온몸으로 관통해온 시간이 녹아들어 문채文綵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글의 우열을 따지는 일은 영혼에 눈금을 매기는 일처럼 부질없는 처사일지도 모..
[좋은수필]금방 죽는다 / 최진석 금방 죽는다 / 최진석 이 단어를 떠올리면 느리고도 느리게 평정이 흔들린다. 이런 비슷한 기분이 들 때 착 가라앉는다고 표현하곤 했던 것 같은데, '착'이라는 단어가 바늘 끝처럼 거슬린다. 어딘가에 딱 달라붙어버린 느낌. 그래서 유동성이 제거되어 상승이나 승화의 기운은 아예 휘발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밀폐성의 답답함. 그러나 내 기분은 사실 '착'을 울타리 치는 이런 느낌들과는 많이 다르다. 차라리 좀 붕 뜬 기분 같기도 하다. 부력을 받는 중량감. 그러면서 흘러가는 그런 상태다. 이 단어는 바로 '죽음'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초입의 조금 늦은 초저녁이었다. 나는 마당에 덕석을 깔았다. 둘러앉아 우리 식구들은 닭백숙을 먹을 참이었다. 엄마가 준비를 하시는 동안 모깃불을 피우고 덕석에 벌렁 ..
[좋은수필]벼꽃이 피었습니다 / 김영란 벼꽃이 피었습니다 / 김영란 벼꽃이 피었다. 대서가 지나자 111년 만의 더위라는 수식어가 붙은 올여름에도 변함없이 작고 하얀 꽃은 피었다. 논에 갔다 오는 남편이 밝은 목소리로 이삭이 팼다고 한다. "벌써? 벼꽃이 피었으니 이제 가을이네. 그런데 당신은 왜 벼꽃을 이삭이라고 해?" 남편은 이른 가을 소식에 복중 무더위쯤이야 잊은 듯이 즐거워하는 나를 '농사꾼 마누라 몇 년인데 아직도 이삭하고 벼꽃을…'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삭은 꽃이 아니라 열매네요. 꽃은 이삭하고 같이 펴서 하루나 이틀 지나면 져. 농사꾼은 꽃이 아니라 이삭이 보이고. 그러니까 이삭이 팬다고 하지. 나갑시다. 벼꽃을 직접 봐야지." 그 수많은 이삭들은 내게 꽃이었는데 이제서야 벼꽃과 이삭이 다름을 알았다. 시골살이 스무해가 넘..
[좋은수필]가면놀이 / 곽흥렬 가면놀이 / 곽흥렬 덩실덩실, 신명난 춤사위가 허공을 가른다. ‘얼~쑤, 얼~쑤’, 연신 넣어대는 추임새로 애드벌룬 띄우듯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둘러선 구경꾼들의 눈과 눈이 일제히 춤판으로 모아진다. 등장인물과 관객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었다. 학부 시절, 수양버들 해 그림자가 장승처럼 키를 키우던 어느 봄날 오후는 그렇게 깊어갔다. 일청담日淸潭 연못가의 잔디 광장에서 한바탕 거방지게 놀이마당이 펼쳐졌었다. 난생 처음으로 구경한 그날의 탈춤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것은 여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였고,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감동이었다. 그때의 감동이 기억 저편에 깊숙이 각인된 채 오랜 날들 동안 나를 지배했다. 안동의 하회 민속마을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강산이 두어 번이나 바뀔 ..
[좋은수필]달밤 / 최현숙 달밤 / 최현숙 물속처럼 고요하다. 차 소리마저 끊긴 마을이다. 아침나절 가루로 내리다가 폭설이 되어 덮인 하얀 세상이 옛이야기에나 나올 듯 적막하다. 눈길을 걷고 싶어 달빛 잔잔한 뜰을 내려선다. 이런 풍경을 태고라 일컫는 것일까. 대문을 나서려다 발을 멈춘다. 가엾어라, 달빛 속에 외로운 섬처럼 서 있는 우리 집, 사람 다닐 만한 너비로 말끔하게 길이 나 있는 이웃과 떨어져 세상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듯 눈에 갇혀 막막하다. 창마다 불이 꺼지고 사람 기척이라고는 없는 밤, 나서던 대문을 되돌아 들어와 눈삽과 빗자루를 챙겨 든다. 내 집 앞에도 길을 내어 그들과 이웃이 되고 싶어서다. 사람의 정도 막힘없이 드나들 편한 길을 내리라. 편지통 지붕의 눈을 쓸어내리고 가까운 향이네로 마을회관 앞으로 집집마다 ..
[좋은수필]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박월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박월수 한 줌 남은 가을이 저문다. 집 없는 새들이 바람 자는 풀숲에 무더기로 깃들이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소통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계절이다. 갈수록 줄어드는 햇빛 탓에 움직임이 둔해진 누군가는 세로토닌 부족으로 하여 날마다 우울을 앓는다. 불혹의 선상에서 바라보는 십일월은 성숙하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동시에 소유하고 지배하는 계절이다. 그 둘 모두를 내면에 품는다. 조락의 계절이 지나고 속이 그득한 열매를 거둬들인 후 마음 구석구석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배어나는 달이다. 풍족함이 넘치면 사무치게 외로워지기도 하다. 나는 그럴 때면 낮은 첼로 음률이 가슴을 적시는‘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듣는다. 이은미의 목소리로 듣는 이 노래는 가으내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
[좋은수필]길을 줍다 / 박양근 길을 줍다 / 박양근 내 서재에 서서 그림 한 점을 바라본다. 5호 크기의 사각형 액자 안에 온통 녹색의 풍경이 넘친다. 짙푸른 수림 사이로 뻗어 있는 길은 연둣빛이다. 길의 끝 즈음에 녹색 산등성이가 보이는데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 점 엽록소가 되어 그림 속으로 흡수되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 그림은 수년 전에 어느 문인이 선물로 준 것이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연둣빛과 짙은 초록을 넘나드는 성하의 숲에 녹색으로 물든 좁은 길이 굽어진 그림이었다. 원화原畵의 가운데를 잘라낸 조각 그림처럼 시종始終이 없었다. 그림은 마치 "어디쯤 와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화가의 질문인지, 숲이 묻는 목소리인지, 아니면 자문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숲길은 내게 들어오라는 조용한 눈길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