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박월수
한 줌 남은 가을이 저문다. 집 없는 새들이 바람 자는 풀숲에 무더기로 깃들이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소통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계절이다. 갈수록 줄어드는 햇빛 탓에 움직임이 둔해진 누군가는 세로토닌 부족으로 하여 날마다 우울을 앓는다.
불혹의 선상에서 바라보는 십일월은 성숙하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동시에 소유하고 지배하는 계절이다. 그 둘 모두를 내면에 품는다. 조락의 계절이 지나고 속이 그득한 열매를 거둬들인 후 마음 구석구석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배어나는 달이다.
풍족함이 넘치면 사무치게 외로워지기도 하다. 나는 그럴 때면 낮은 첼로 음률이 가슴을 적시는‘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듣는다. 이은미의 목소리로 듣는 이 노래는 가으내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십일월의 하늘빛 닮았다. 아득한, 혹은 막막한 입맞춤이 연상되기도 하고, 무대에 선 그녀의 맨발을 떠올리면 내 속에 숨었던 열정이 다시금 꿈틀거리며 기어 나올 채비를 하는 듯도 하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랑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아프로디테의 생일 축하연에서 만난 신 ‘포로스’ 와 결핍의 신 ‘페니아’ 사이에서 에로스는 태어난다. 사랑의 신은 모자람과 넘침 사이에서 헤매는 중간자이다. 사랑이 쓸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알 것도 같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영혼마저 구속하려 한다. 사랑의 기원을 기억한다면 쓸쓸함을 즐기는 여유도 배워야 하리라.
쉼 없이 피던 장미도 시들고 모든 연약한 것들은 더 이상 꽃 피우지 않는 계절이다. 절정으로 치닫다가 사그라지는 이맘때의 산을 오르면 유난히 눈에 띄는 붉은 열매가 있다. 가시 많은 청미래 덩굴나무에 열리는 명감이다. 어린 산짐승의 눈 같은 명감과는 달리 뿌리는 징그러운 곤충을 닮았다. 마치 살찐 지네 같기도 하고 사막에서 만난 전갈 같기도 하다. 마주잡고 부딪치면 투박한 소리가 나고 만져보면 돌덩이처럼 딱딱하다. 나는 해마다 이른 봄이면 청미래 덩굴 뿌리로 술을 담근다. 그리고 쓸쓸해서 손 시린 이 계절의 어느 저녁 낮은 첼로 음을 배경으로 소중한 의식을 치르듯 술 단지를 개봉한다.
술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취하기 위해 마신다는 걸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빛깔 때문에 마신다. 청미래 덩굴 술은 명감 빛깔보다 더 붉다. 한 시인은 사루비아를 일러 ‘사랑만 하다가 죽은 이의 피’ 같다고 했지만 청미래 덩굴 술 빛깔을 보고 있으면 지나친 그 붉음에 절로 눈물이 난다. 사랑을 못 이루고 죽은 이의 혼이 이 나무의 뿌리로 굳어버리지 않았나 싶어서이다. 쓸쓸함을 달래기엔 더없이 좋은 빛깔이다.
지네 혹은 전갈 닮은 뿌리로 담근 술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몸속 안의 독소를 밖으로 몰아낸다. 사랑 때문에 오래 아팠던 사람도 이 술을 마시면 남은 상처가 모두 아물지도 모른다. 한 해 동안 내 속에 쌓인 지독한 생각들도 모두 씻어내 주길 바라며 나는 또다시 술을 따른다. 몽롱한 가운데 나지막한 첼로 소리가 번진다. 말랑해진 내 맘에 오래 묵은 그리움이 꿈틀거린다.
핏빛 독주를 홀로 마시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온통 잿빛뿐인 지금은 잃어버린 사랑을 추억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이제 남은 해는 속절없이 지나버리고 말리니 더 늦기 전에 땅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한 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길을 나서 보는 건 어떨까. 그 사랑의 대상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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