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 최현숙
물속처럼 고요하다. 차 소리마저 끊긴 마을이다. 아침나절 가루로 내리다가 폭설이 되어 덮인 하얀 세상이 옛이야기에나 나올 듯 적막하다. 눈길을 걷고 싶어 달빛 잔잔한 뜰을 내려선다. 이런 풍경을 태고라 일컫는 것일까.
대문을 나서려다 발을 멈춘다. 가엾어라, 달빛 속에 외로운 섬처럼 서 있는 우리 집, 사람 다닐 만한 너비로 말끔하게 길이 나 있는 이웃과 떨어져 세상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듯 눈에 갇혀 막막하다. 창마다 불이 꺼지고 사람 기척이라고는 없는 밤, 나서던 대문을 되돌아 들어와 눈삽과 빗자루를 챙겨 든다. 내 집 앞에도 길을 내어 그들과 이웃이 되고 싶어서다. 사람의 정도 막힘없이 드나들 편한 길을 내리라.
편지통 지붕의 눈을 쓸어내리고 가까운 향이네로 마을회관 앞으로 집집마다 이어지게 길을 낸다. 누군가 밤새 몰래 치워준 것처럼 흐뭇할 아침을 생각하니 삽자루 든 손에 힘이 솟는다. 설레며 바라볼 뿐 내 손으로 눈 쓸 생각은 왜 못했을까. 서툰 삽질로 끙끙대는 달밤의 체조는 달님 혼자 보기에 아까운 풍경이리라. 긴 작업을 끝내고 눈 사이로 난 길을 따라나서며 생각한다. 시골집으로 온 뒤 대문을 닫은 적 없었고 만나면 서로 웃으며 반가웠는데 나는 아직도 이방인이었구나. 달빛이 위로하듯 내려와 안긴다.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읍내에서 신작로를 따라 시골집으로 가던 밤, 무언가 소리 없이 따르는 기척에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뭔지 모를 가만한 느낌이 달빛이라는 것을 하늘을 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 치마꼬리를 잡아 늘이며 뒷걸음질 칠 때도 어머니 손에 끌려 바삐 걸을 때도 뒤따르던 달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고요히 따라오는 달이 좋았다.
"엄마, 달이 왜 자꾸 나를 따라오지요?"
"달은 착한 사람을 따라다닌단다."
그 뒤로 나는 달이 더 좋아졌고, 달밤에 하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힘들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제사가 많았다. 달력에 표시된 제삿날은 기다릴수록 더디게 와서 조급증이 났다. 떡 만드느라 부산한 모습과 고소한 기름 냄새가 좋았다. 잔칫날처럼 대청 가득 둘러앉은 제관들도 반가웠다. 그러나 제사를 기다린 것은 음복 나르는 심부름에 따라나서는 밤길이 좋아서였다. 제관들 음복을 드린 후 골고루 챙긴 음식을 긴 목판에 담아 이고 부엌 언니가 마당을 나서면 나는 어머니가 일러 주는 집을 향해 앞장서 걸었다. 논둑길을 지나 삽살개가 시끄럽게 짖어대는 삽짝 거리에 이르면 우리 제사를 꿰고 있는 이웃들은 미리 알고 반겨 주었다. 희붐하게 날이 밝아올 때까지 여러 집을 다녀도 힘든 줄 몰랐다. 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락산 깊고 푸른 달도 좋았다. 별똥별이 비처럼 쏟아진다고 떠들썩하던 대학 삼학년 가을이었다. 그 진풍경을 흐린 서울 하늘에서 볼 수는 없다며 일찌감치 텐트를 친 수락산 산정山頂에도 달이 밝았다. 예보했던 대로 밤하늘은 쉼 없이 별을 떨어뜨렸지만 별 보다 마음을 끈 것은 호젓하게 내리던 달빛이었다. 소곤대는 소리조차 미안하도록 고요한 산 구석구석 스미던 달그림자였다. 단풍 든 골짜기마다 달빛으로 그윽하던 밤, 설레어 잠 못 이루던 그 밤이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달은 고향이었다. 서울을 떠나 여섯 해 남짓 살던 뉴질랜드에서 우리는 달 뜨는 주말이면 바비 큐 그릴에 불을 지폈다. 고향 떠난 사람끼리 불가에 모여 앉으면 달빛 내린 뜰은 고향 마당이 되었고 함께 나누는 얘기는 지루한 적 없었다. 서로 기대어 부르는 고향 노래에 남몰래 목이 메던 날들, 밤이 깊어 불꽃이 사그라지면 달과 함께 길을 나서는 사람들 뒷모습이 쓸쓸했다. 그 모습이 나였고 고향 떠난 우리 모두였다. 그리움이 머무는 곳, 달은 고향이었다.
달이 있으면 언제나 좋았다. 시골마을과 도시 빌딩 위, 이국 하늘 아래에서도 달은 외로움을 감싸주는 속 깊은 친구였다. 발이 푹푹 빠지도록 쌓인 눈길을 달빛에 젖어 걷는다. 일상의 풍경도 달빛을 더하면 그리움 되는 나에게 오늘밤 언 손으로 눈을 쓸던 기억은 또 하나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심부름에 따라나서던 어린 날과 수락산의 가을밤, 달을 보며 고향 그리던 쓸쓸하던 시절과 함께.
고샅길로 들어선다. 불 꺼진 창과 좁은 길이 부드러운 빛으로 따스하다. 달빛에 안겨 있는 정다운 이 마을이 내가 사는 곳인가. 무심하던 골목이 스쳐보던 집과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선다. 달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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