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미소 / 허창옥
세상의 꽃들은 지금 웃고 있다. 앞 집 담 너머 목련은 함박웃음을 웃고, 요 며칠 햇살이 따스하더니 효목로의 벚꽃도 여럿이 모여서 까르르 웃는다. 봄빛이나 봄꽃이 눈물겹도록 곱다.
바깥에 나갔다 돌아오니 책상 위에 예쁜 꽃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친구가 놓고 갔다는 것이다. 바구니에는 노란 프리뮬러가 가득 피어있다. 눈을 감고 천천히 허리를 굽힌다. 코끝에 닿는 꽃잎의 감촉과 향기가 내 마음을 봄꽃처럼 환하게 한다.
봄빛이 친구를 불러냈는지 늘 바쁜 사람인데 불로동 화훼 단지에 갔었단다. 친구는 바구니에 꽃꽂이를 하지 않았다. 아주 키 작은 프리뮬러를 한 포기씩 심은 주먹만 한 고무 화분 여덟 개로 바구니를 빼곡히 채웠다. 다섯 장의 동그란 꽃잎은-- 여럿이 사진 찍을 때 어깨를 조금씩 겹치듯이--한쪽으로 살짝살짝 겹쳐져 있다. 연노랑 엷은 꽃잎에 진노랑 잎맥이 아기 손바닥의 손금처럼 앙증맞게 드러나 있다. 그 꽃 예닐곱 송이씩을 모아서 긴 타원형의 도톨도톨한 잎들이 감싸 안고 있다. 밝은 노랑과 투명한 초록의 조화가 멋지다. 오월 말까지는 피고 지고 한다니 꽂은 꽃보다 오래 볼 수 있어서 좋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도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한참 눈을 맞추다가 하도 예뻐서 내가 빙그레 웃었더니 꽃도 살짝 웃는다. 꽃이 웃는다. 정말이지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 고 보드라운 얼굴을 다시 보아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 있는 게 분명하다.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종족 번식을 위해 치열한 생존경쟁을 한다고 한다. 꽃이 색깔과 향기, 꿀을 가지는 것은 나비나 벌을 유인하기 위한 존재방식일 뿐이라고들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뿌리와 줄기와 잎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 꽃이 피는, 그리고 꽃이 제 생명을 다 바치고 시든 다음에야 열매가 맺히는 것이 식물의 고단한 한살이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이 예쁜 꽃이, 저 탐스런 목련이, 이 산 저 산의 진달래가 찡그리기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닐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그 의미가 무엇이든 꽃의 미덕은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리라. 만약 꽃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름답다'란 낱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본질을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어서 아름답고 지는 뜻을 알겠기에 더 아름답다.
꽃은 저마다 독특한 자태와 향기와 빛깔로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때로는 위로해 준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흔히들 꽃을 한아름 안겨주곤 한다. 꽃은 대개 멋진 꽃말을 가지고 있다. 꽃을 주거나 받을 때 꽃말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하는데,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꽃은 때로 시가 되고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꽃을 보면 누구나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된다. 그랬다. 나는 꽃을 보면 웃는다. 내가 웃으면 꽃도 웃고 꽃이 웃으니 나도 웃는다. 오늘 노오란 프리뮬러의 미소를 보고 생각한다, 꽃을 닮고 싶다고. 작은 풀꽃이어도 좋으리. 나만의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싶다. 그 빛깔이 되도록 엷었으면 좋겠고 향기는 은은했으면 좋겠다. 피고 지는 까닭이 고통스런 일일 수도 있겠고 때로는 슬픔일 수도 있겠지만 꽃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내 삶도 그랬으면 한다. 고단하지만 찌들지 않는, 그래서 조용히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꽃을 닮고 싶다니, 당치도 않다. 내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얼마나 잘 살아야 작은 풀꽃의 어여쁨을 지닐 수 있을까. 어떤 마음이어야 은은한 향내가 묻어 나오겠는가. 모를 일이다. 진정 모를 일이다.
지금은 그냥 웃어야지. 봄빛에 환하게 웃는 봄꽃을 마주 보고 웃어야지.
'수필세상 > 좋은수필 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박월수 (0) | 2023.07.04 |
---|---|
[좋은수필]길을 줍다 / 박양근 (0) | 2023.07.03 |
[좋은수필]나무가 굽는 이유 / 김영석 (0) | 2023.07.01 |
[좋은수필]달개비꽃 / 왕린 (0) | 2023.06.30 |
[좋은수필]태그매치Tag match / 김단 (0) | 2023.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