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굽는 이유 / 김영석
산에 올라 보면 안다. 아무리 울울창창한 숲이라도 그 안에 들어서면 나무와 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다는 것을. 나무는 공중으로 겅중겅중 걸어가면서 그러나 지상에 길을 만드는 걸 결코 잊지 않는다.
나무는 제 길만 고집하지는 않는 것이다. 상수리며 가문비, 팽나무를 보면 조금씩 몸이 굽어있다는 걸 안다. 그건 나무들이 누군가에게 길을 만들어주기 위해 제 몸을 비낀 흔적이다. 저 비낀 곳으로 바람과 햇살과 온갖 짐승이 두리번거리며 지나갔을 것이다.
나무가 내어준 길을 따라 바람은 설레며 먼 바다에 닿았을 것이고, 오소리는 너럭바위 아래서 따뜻한 저녁이 되었을 것이며, 어린 개똥지빠귀는 대숲 우듬지를 떠나 구름까지 솟아올랐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무는 조금씩 더 자신의 몸을 굽혔을 것이다.
요즘 가로수로 많이 쓰이는 메타세콰이어는 직립만 고집하고 있어서 그 거만함 때문에 사실 배타적이다. 나무는 적당한 곳에서 조금씩 굽어야 따뜻해 보이고 그래야 그 곁에 지친 몸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정호승의 시 ‘나무에 대하여’에는 굽은 나무에 눈이 더 많이 쌓이고 새도 더 많이 날아온다고 하였다. 그런 것처럼 너무 반듯하고 빈틈없는 사람은 왠지 가까이하기가 어렵다. 거기에는 함박눈이 쌓이지 않고 새도 날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굽히고 양보할 줄 아는 사람에겐 피톤치드 같은 은은한 향기가 난다.
나무가 내어준 길을 따라 걷는다. 낙엽과 그늘을 보료처럼 깔고 있는 숲속의 길은 나무의 성품을 닮아 부드럽게 휘어져 있다. 가파르게 등성이를 향하여 오르다 간 숨이 가빠질 때쯤 산허리를 가볍게 안고 휘돌아가는 오솔길. 곧장 뻗은 나무에게 위로를 기대할 수 없듯이 곧장 뻗은 길들에게도 삶을 위무해 주는 위로가 없다. 나는 너무 곧바른 것만 지향하진 않았을까? 굽은 나무는 나를 반성하게 하는 고요하고 푸른 거울이다.
지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산벚나무의 가슴에 나를 기대어 본다. 나무는 덜컹거리던 산 아래의 나를 읽으며 내 굽은 등을 고스란히 받아준다. 굽은 것만이 굽은 것을 껴안아줄 수가 있다. 굽지 않았다는 것은 지난한 상처가 없다는 것이고 지난한 상처가 없다는 것은 삶의 풍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면서 질곡과 부침이 없는 사람과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나무의 굽은 곳을 만져본다. 다른 부위보다 조금 더 따뜻하다. 휘어진 저곳에서 나무의 생각은 턱을 괴고 오래 사색에 잠겼을 것이다. 그 곡진한 곳에 앉았다 갔을 별빛과 구름과 빗소리, 그때마다 나무는 온몸에 수천 개 귀를 달고 그것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을 것이다. 그리곤 길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만조의 바다가 수평선 너머로 배를 띄우는 이유와 청설모의 눈이 여울처럼 반짝이는 이유와 새들이 어제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이유가 나무 한 그루의 베풂에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 오후, 산을 내려오는 내 몸이 조금 더 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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