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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바람 부는 날 / 김응숙

바람 부는 날 / 김응숙

 

 

바람이 인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득한 목소리 같은 바람 한 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든다. 그 소리를 듣고 이제 갓 꼭지가 여문 여린 나뭇잎이 귀를 팔랑거린다. 요즘 들어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불어오는 바람이다.

한 번 불기 시작한 바람은 오래도록 감아두었던 시간의 타래를 풀듯 끊임없다. 갈아엎어 놓은 논에 웃자란 풀들이 바람보다 먼저 엎드린다. 그 풀등을 타고 바람이 거침없이 내닫는다. 들판은 풀등의 출렁거림으로 가득하다. 마치 등을 들썩이며 춤을 추는 것 같다. 그 위로 투명한 햇살이 갈기처럼 날린다.

5층 베란다 창으로 내려다보니,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 것 같다. 묵은 염원을 풀어내며 들판이 바람의 연주에 마음껏 춤을 추고 있다. 바람이 음악인 셈이다. 그러나 꼭꼭 닫아 놓은 창문 안으로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냥 무풍지대에 머물며 바람찬 들판을 바라보고만 있다. 음악이 들리지 않는 춤을 보고 있다.

거실로 들어와 플레이어에 CD 한 장을 얹고 음악을 튼다. 오래된 비틀즈의 노래들이다. 조금 볼륨을 높여본다. '예스터데이'의 선율이 흐른다. 멜로디를 따라 바람이 인다. 바람이 거실을 휘돌아 가슴께로 다가온다. 가슴이 풀등처럼 들썩인다. 내 가슴으로 들어간 바람이 쉬이 나오지 못하고 가슴 벽을 밀쳐대는지 울대가 뻑뻑해진다. 나는 일어나 눈을 감고 흔들흔들 걸어본다.

며칠 전 음악이 흐르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예의 그 타들어갈 것 같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졸린 듯 눈을 내리깔며 알 수 없는 말들을 건네 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에게 다시 모진 바람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토록 그치기를 바랐건만, 내 가슴에서도 시린 바람 한 줄기가 일었다.

사람들에게서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던가. 그 스치는 옷깃에서도 바람은 일었다. 살짝 마음 귀퉁이를 들었다 놓는 미풍에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불어대는 열풍을 지나, 가끔은 끝내 파국으로 이끄는 광풍도 불었다. 서로가 마주 보는 것이 인연이라면 그 사이를 휘돌며 춤추게 하는 것이 바람이었다.

늘 미풍이 불던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중학 과정을 가르치는 야간학교였다. 나는 일반 중학교에 진학해 채 일 학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가난에 덜미가 잡힌 우리 집이었다. 공납금은 고사하고 학교에 갈 차비도 융통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총기가 아까우니 어쨌든 공부는 시켜야 하지 않겠냐며 어머니가 나섰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팍팍한 언덕배기를 밟고 들어선 야간학교였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백열등 아래 책상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초라한 교실이었다. 맨 뒤 옆자리가 비어 있는 책상에 가 앉음으로써 나는 그녀의 짝이 되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제 상처를 핥기에 골몰했던 나를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아 주었다. 비슷한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우리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매일 등굣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미풍에 몸을 녹이며 삼 년의 주경야독을 마쳤다.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바람이다. 대학 2학년 무렵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그녀에게서는 열풍이 불었다. 화려해진 옷차림만큼이나 그녀의 입에서는 현란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열기에 가득 찬 두 눈과 더운 입김이 그녀가 지금 얼마나 뜨거운 열풍에 휩싸여 있는지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젊음의 열정인 줄만 알았다. 이제 한 학기만 마치면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살아갈 친구였다. 곧 자신이 발을 내딛을 세상에 대한 기대와 의욕은 나무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광풍의 시작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그녀를 처음 면회하고 돌아온 날, 나는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잘랐다. 마른 열기로 타들어가는 그녀의 눈 위로 마구 가위질을 한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다. 긴 세월 동안 마치 계절풍처럼 몇 년에 한 번씩 광풍이 찾아왔다. 그녀는 광풍에 혼을 날리며 춤을 추고, 나는 그 주위에서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

가끔씩 친구에게도 바람 사이사이에 평온한 날들이 있었다. 결혼하고 거짓말처럼 딸을 낳았다. 그러나 또다시 부는 바람에 남편은 떠났지만, 딸은 그녀의 곁에 남았다. 바람은 불어도 햇살은 빛나는 것처럼 딸은 그녀에게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되어주었다.

한바탕 바람과 춤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그녀가 그곳을 떠나 아주 멀리 안전한 곳에 이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바람이 맴을 도는지 그녀는 다시 위험한 광풍의 중심으로 다가서고 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저 풀등처럼 제자리에서 들썩이며 끝없이 춤을 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슬프고도 아픈, 그러나 때로는 행복하고 황홀한 춤을 추며 바람을 따라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그러나 돌이켜보니 제자리라 한들 또 어쩔 것인가. 이도 저도 살아 있기에 추어야만 했던 한바탕 뜨거운 춤사위였노라고 조용히 말할 수밖에.

음악은 그쳤는데 창밖의 풀등은 춤을 그치지 않는다. 갑자기 바람을 들이키고 싶은 갈증이 인다. 나는 문을 열고 바람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