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은밀한 기도처럼 / 손광성
혜자는 예쁜 계집애였다. 마리 숄처럼 웃는 혜자는 코끝에 파란 점하나 있었다. 우리는 학예회 때 공연할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은혜를 모르는 사슴>이라는 제목이었는데, 그녀는 사슴이고 나는 포수였다. 사슴은 은혜를 저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포수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였지만 연극 속에서라도 혜자는 차마 쏘고 싶지 않은 아이였다.
우리의 연극은 6.25의 포탄에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그녀를 쏘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서로 다시 만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살게 될 줄 알지 못했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한 사랑이었지만 혜자는 나의 첫 번째 사랑이 되었다.
부산 피난시절 우리는 충무로 부둣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맞은편에는 세 딸을 데리고 서울서 피난 온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큰 딸을 좋아했다. 눈이 상큼하고 가을 서릿발처럼 쌀쌀한 데가 있었지만 그 때문에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판잣집에 사는 피난민들은 집이 비좁아서 겨울에도 길거리에 나와서 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침 햇살을 받은 그 소녀의 물기 어린 목덜미가 그렇게 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 소녀의 이름을 채 알기 전에 서울이 수복되고, 환도바람이 불더니 결국 그 바람은 나로부터 그녀를 데려가 버렸다. 나의 두 번째 사랑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때가 5월이라 모판의 모는 비로도처럼 보드라웠고 근처 야산에는 뻐꾸기도 가끔씩 와서 울었다. 상앗빛 피부에 조금은 노란빛이 도는 머리칼을 한 간호사가 나의 담당이었다. 체온을 젤 때마다 그녀의 옷 사품에서 이상한 향내 같은 것이 솔솔 흘러나왔고, 그리고 그 향기에 결국 나는 취하고 말았다. 입원해 있는 열흘 동안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기쁨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코끝에도 혜자의 것과 같이 겨자씨만 한 파란 점하나 있었다. 혜자가 환생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건 분명 무슨 암시이거나 아니면 인연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믿기 시작했다. 열흘 만에 내 병은 나았지만 나는 도리어 다른 병을 얻고 말았다. 그녀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커다란 아픔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 그녀의 환자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서 제 입원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병이 나의 간절한 사랑을 이해해 준 것이다.
나 하나를 데리고 월남한 누님은 내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해서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난다는 기쁨으로 해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두 주일도 다 채우지 못하고 나는 병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야속하게도 나를 그녀에게 되돌아가게 했던 나의 고마운 병이 이번에는 나를 배신한 것이다. 만약 내가 그녀의 환자로 남을 수만 있었다면 어떤 병도 잘 참고 오래오래 앓을 수 있었을 텐데,
대학에 입학하자 새 옷을 찾아 입고 내가 제일 먼저 간 곳은 그녀가 일하던 병원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결혼한 뒤였다. 그때도 오월이었으니까 분명 뻐꾸기가 울었을 테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기억이 없다. 그리고 한 삼 년 지나고서였던가? 나는 그녀의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소녀를 좋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층계를 내려올 때면 언제나 나비처럼 두 손을 나풀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앞의 소녀들처럼 예쁜 쌍꺼풀은 아니었지만 맑게 닦은 안경알 너머에서 잔잔히 웃고 있는 눈매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오월 어느 날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났을 때는 핑크색 원피스에 하얀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막 피기 시작한 한 떨기 사과 꽃이었다. 그 후부터 내가 그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녀는 그때의 그 화사한 모습으로 파란 잔디밭에 앉아 있곤 했다. 나는 운동 같은 것은 별로 즐기지 않는 성미다. 그러나 그녀가 정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후부터 나도 정구를 시작했고, 그래서 그해의 여름방학을 온통 하얀 정구공으로 메워 버릴 기세로 연습에 열중했지만 소질이 없었던 탓으로 내 실력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 어설픈 실력이나마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그해 여름의 몇 순간은 행복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다시 정구를 쳐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 해 여름 방학이었다. 나는 그녀의 생각으로부터 멀리 떠나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간 곳은 겨우 동해안 화진포였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그 포구에서 나는 수평선만 바라보면서 사흘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머지 사흘은 비가 내렸고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그녀의 이름만 쓰다가 잠이 들곤 했다.
이레째 되던 날 나는 모든 상념을 떨쳐버릴 생각으로 바닷가에 나갔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빈 조개껍데기만 몇 개 주워 가지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 보잘것없는 조개껍데기 가운데서 제일 작은 것을 골라 그녀에게 부쳐주었다. 마치 그것이 나의 부끄러운 사랑이기나 한 것처럼. 만일 그때 나의 마음을 편지로 썼더라면 대학 노트 한 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었지만, 나는 겨우 한 줄도 채 못 되는 글을 써서 작은 조개껍데기와 함께 부치는 것으로 만족했다.
“바다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 많은 말들 가운데 그때 내가 쓸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이름도 밝히지 못했다. 개학이 되어 나는 다시 돌아와야 했고 다시 그녀를 만나야 했지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는 결국 못하고 말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수줍어서 말을 못했고 나중에는 아예 안 하기로 했다. 나의 성격 때문이었다. 아니다. 윌리엄 블레이크 때문이었다. <사랑의 비밀>이란 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Never seek to tell the love,
Love that never told can be;
For the gentle wind does move
Silently, invisibly.
매우 감동했고, 그 순간부터 그것은 사랑에 대한 나의 어설픈 경전이 되고 말았다. 사랑이란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드리는 은밀한 기도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0년 11월 27일 밤은 그해의 첫눈이 온 날이었고, 나는 내 마음속의 여인을 떠나보낸 날이었다. 눈은 어느 해보다 많이 왔지만 나는 말없이 그녀를 보냈다. 인생은 사는 것보다 꿈꾸는 편이 더 났다던 누군가의 말이 그 순간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네 번을 사랑했다. 두 번은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한 사랑이었고, 나머지 두 번은 사랑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고 만 사랑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투명한 아침 이슬이었고, 빈방에서 홀로 드리는 은밀한 기도였다. 그리고 지금은, 꽃잎을 스쳐간 젊은 날의 어느 쓸쓸한 바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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