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영원한 현역이다 / 곽흥렬
요 몇 해 사이 까까머리 고향친구들에서부터 학부 동기생들에 이르기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역에서 물러났다. 한 직장을 삼십 년 혹은 사십 년간 다니다 은퇴한 벗도 있고, 이 사업 저 사업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 손을 놓은 벗도 있다. 그들이 이제 하나씩 둘씩 일을 그만두고 오랜 매임에서 놓여나 여생을 한유하는 사이에도 나는 여전히 창작의 끈을 붙들고 원고지와 씨름 중이다. 아니, 전보다 더 바쁘고 더 치열하게 집필을 해 나가고 있다. 거기다 이곳저곳에서 진행되는 정기적인 창작 강좌며 가금씩 요청이 오는 특강을 소화해 내느라 노상 쫓긴다.
강의만으로 끝나는 일도 아니다. 각종 문예지며 이런저런 사회단체, 기업체 사보 같은 곳으로부터 날아드는 원고 청탁에 응하느라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 머릿속은 쉴 새 없이 피어나는 상념들로 늘 복잡하게 돌아간다. 그렇지만, 누가 억지로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전혀 힘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를 두고서 ‘즐거운 고통’이라고 표현한다면 어폐가 있을까.
어느 정도 밥 먹고 지낼 만한 여유만 허락된다면 창작 생활만큼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도 그리 흔치는 않다고 나는 확신한다. 창작 생활이 지닌 긍정적인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이다.
우선 가장 좋은 점은 각박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사에서 정신건강에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날이 갈수록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것이 이즈음의 상황 아닌가.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일 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조금 더하고 덜하고 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 없이 금전에 꺼둘리어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항시 물질에 허기가 진다. 이 물질로는 메우지 못하는 마음의 공동空洞이 글쓰기를 통해서 채워질 수 있다. 글쓰기가 우리의 병든 영혼을 다스려 주는 치유제인 까닭이다.
그런가 하면,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비슷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끼리 만나 영혼을 교감함으로써 세상살이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이겨내는 힘을 얻게 해준다. 요즘 사회는 혈연 중심에서 동호인 중심으로 급격히 이행 중이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 사이의 관계 맺음은 이제 피보다 진한 시대가 되었다. 거기다 나이 들어가면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더구나 글쓰기 가운데서도 특히 수필 쓰기는 자기 고백을 통해 서로 삶의 애환을 공유할 수 있는 문학이니만큼 유대감을 높이는 데 가장 적합한 장르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활동이기에 뇌가 녹슬지 않아 고령화로 인해 무섭게 늘어가고 있는 치매 예방에도 특효약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이런 장점들로 하여, 비록 금전과는 거리가 멀지만 세상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활동이 글쓰기라고 하여도 좋으리라.
작가는 영원한 현역이다. 직업에는 정년이 있지만 창작에는 정년이 없다. 붓을 잡을 힘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계속 해나갈 수 있는 것이 창작 생활이다. 그러기에 죽는 순간이 비로소 현역에서 물러나는 시점이 된다. 아니, 죽음으로써 끝도 아니다. 비록 몸뚱어리는 썩어 없어질지언정 그의 작품은 남아 시간과 함께 영원히 흐르기에 끝나도 끝나지 아니하는 것이 창작 인생이다.
여기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려면 몰라도 작가로서의 삶에 보람을 느끼고 긍지를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 발 막대 저어 봐야 짚 검불 하나 걸릴 것 없는 철빈鐵貧의 처지에서는 창작 활동을 계속해 나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굶어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경제적 기반 없이 글쓰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너무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주의적 자세일 뿐이다. 그러기에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만 충족된다면 누구든 한번 도전해 볼 만한 매력적인 삶이 창작 생활이라고 하겠다.
오로지 이런 즐거움 하나로, 돈도 권력도 명예도 주어지지 아니하는 글쓰기에 매달려 나는 오늘도 원고지 앞에서 머리를 짜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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