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 강천
제비가 왔다. 푸른 하늘을 마음껏 활갯짓하는 모습이 거침없어 보인다. 예전만큼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해마다 찾아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늘 이맘때쯤이면 놀부가 제비 기다리듯 애가 탄다. 제비를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탓이다. 이미 들판은 파릇해지고 봄 냄새가 물씬해도, 진달래가 피고 제비가 하늘을 날아야 완연한 봄 기분이 난다. 제비는 혼자 오지 않는다. 봄소식은 물론, 흥부네 박처럼 주렁주렁 꽃들도 같이 데려와서는 지천으로 흩어놓는다. 그중에는 나지막한 키에 보라색이 도드라져 보이는 꽃도 있다. 제비가 올 무렵에 같이 찾아오는 꽃, 그래서 이름도 제비꽃이다.
제비꽃은 이름도 많다. 모진 겨울을 보내느라 식량이 다 떨어진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시기에 핀다고 오랑캐꽃이라고 한다. 또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는 때와 비슷한 시절에 온다고 병아리꽃이다. 생긴 모양이나 쓰임새에 따라서 다르게도 부른다. 쪼그리고 앉아야 눈을 마주할 수 있다고 앉은뱅이꽃, 꽃으로 가락지를 만들어서 가락지꽃이다. 꽃줄기를 엇걸고 꽃 시름을 한다고 씨름꽃, 어린잎을 나물로 먹었다고 외나물꽃이라고 부른다. 봉기풀, 파리꽃, 장수꽃, 다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사람과 친숙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제비꽃의 다양한 이름도 이름이지만, 노랑제비꽃, 흰제비꽃, 호제비꽃, 그 종류도 육십여 가지가 넘으니 일일이 제 이름을 찾아 불러주기조차도 쉽지 않다.
나는 남들과 약간 다른 이름을 가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름으로 두 자를 쓰는 데 비해, 나처럼 외자 이름을 쓰는 이는 만나기 쉽지 않다. 이름이 독특하다 보니 처음 안면을 트는 사람도 나를 쉽게 기억한다. 이 특별함이 한때는 원망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 사회 시간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전 학년을 통틀어도 외자 이름을 쓰는 학생이 두셋밖에 없다 보니 선생님에게 빨리 기억되었나 보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질문할 때마다 내 이름을 불러서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 어찌나 무서워던지 도망치고 싶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명함을 교환할 때마다 이름이 좋다고 호감을 나타내고, 필명이냐고 묻는 이도 있으니 더없이 좋은 이름이기는 하다.
담장 아래서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는 제비꽃을 만났다. 시멘트벽과 포장길이 만나는 곳이다. 흙이라고는 한 줌도 보이지 않는 틈바구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문득 떠오른 옛 생각을 더듬어 꽃 씨름이라도 해 볼 요량으로 손을 내밀다가 멈칫, 거두고 만다. 물 한 모금 없는 곳에서 이리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생명이 경이로워서다. 누구든 힘들지 않은 삶이 있으랴. 다른 그 어떤 이의 고난보다도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다. 이 제비꽃 역시 그러하리라. 제비꽃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어떤 틈바구니에서건, 어느 장소에서건 기어코 꽃을 피워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름이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르는 말'이다. 제비꽃처럼 다르게 부르는 별명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가지는 이도 많다는 이야기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생각에 따라. 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보이니 부르는 이름도 다른 것이다. 이름에는 제 나름의 이름값이 있다. '명성에 따라 그에 걸맞게 하는 행동'이 이름값이다. 이름을 부르면서는 무의식적으로 그와 관련된 심상을 떠올리게 된다. 호랑이라고 불면서 당당함과 우렁찬 포효를 생각하고, 버들을 이야기하면 부드러움과 흩날리는 가지를 상상한다. 내 이름에는 어떤 이름값이 붙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남들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나는 무엇으로 연상될까. 쉽게 기억된다고 좋아할 정도의 값어치는 하고 사는 것일까.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를 가진 저 제비꽃이 당당히 꽃을 피워내듯, 내가 걸어야 할 나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기나 한 것일까.
남들이 부러워하고 쉽게 기억해 주는 나의 이름값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 이름으로 쓰인 글들은 어떠한지. 가족으로서, 친구로서, 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은 제대로 하는 것인지.
담장 틈바구니에 살지만, 수십 가지 별명의 이름값을 당당하게 지고 가는 제비꽃 앞에서 한참을 쭈그리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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