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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반야월시장 / 박헌규

 

반야월시장 / 박헌규

 

 

지지고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코 요기, 입요기, 눈요기까지 발걸음이 더디다. 가게마다 아재요, 아지매요, 새댁아! 소리가 정겹다. 삼거리 골목, 난전의 분이 할매는 오늘도 정구지 한 모숨에 주먹만 한 감자 하나를 덤으로 비닐봉지에 담는다. 정情이라고 한다. 마음 재고, 주머니 재는 야박한 흥정 따위는 볼 수가 없다.

어젯밤 늦게까지만 해도 차가 달리던 신작로 길이었다. 낡고 오래된 주택들을 양쪽에 끼고 길게 뻗은 도로에 차량 대신 형형색색의 차일과 천막이 이마받이를 하는 곳, 닷새(1일, 6일)마다 열리는 반야월 전통 재래시장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장 재미가 뭐 별것인가. 원하는 볼거리 먹거리 넘쳐나고, 값싸고 질 좋은 물건 부담 없이 장바구니에 채울 수 있다면 그게 재미 아닌가. 그리고 크지 않은 잔돈푼으로 입 즐기고 배까지 불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반야월시장이 바로 그런 곳이다. 우선 장이 서는 시작부터가 장꾼들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하다. 타 지역 시골 오일장은 아침나절에 반짝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가 오후 이른 시간이면 파장罷場인 데 반해 반야월장은 오히려 오전에는 조용하다가 오후 서너 시가 되어야 시장 분위기가 잡힌다. 그러다가 해거름에는 시장 바닥이 비좁을 정도로 성시를 이룬다. 지역 특성상 반야월은 아직 시골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부도심, 도농 복합형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채소나 과일 등 농산물은 전부가 이곳 인근에서 심고 가꾼 것들이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연근은 전국 생산량의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연근 하면 반야월, 반야월 하면 연근”이다 할 만큼 각종 매스컴에 유명세를 타고 있다. 덕분에 값싸고 질 좋은 연근을 구입하려면 이곳 시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농촌 인구가 줄어들고 주변의 대형 할인 마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전통시장이 많이 위축되거나 사라져 간다지만, 이곳 반야월장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호황을 이루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럿 있겠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난전亂廛이다. 인근 다른 오일장을 찾아가 보면 현대화라는 명분 아래 시장이라기보다 거대한 마트에 들어선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공산품, 수산물, 농산물 할 것 없이 밝은 조명 아래 번들거리는 진열장 안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한마디로 시장 맛이 크게 나지 않는다. 시장의 맛은 뭐니 뭐니 해도 난전이 만든다. 난전이 전통 재래시장의 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반야월장은 세월의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 근대화 물결이 멈춰 선 곳이다. 지금도 장날이면 시장에 접한 샛길, 골목에는 난전 좌판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시장 전체가 난전인 것이 반야월시장의 가장 큰 멋이다. 그래서일까. 장날이면 먼 곳에 사는 사람들도 입소문을 타고 이곳을 찾는 등 친구들 모임이나 가족 나들이 장소가 되기도 한다.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시장 크기에 놀라고 북적대는 인파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한 번 다녀간 사람은 또 다음 장날을 기다릴 만큼 매력적인 시장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반야월장의 진면은 늦은 오후 시각에 펼쳐진다. 밤이 이슥할 때까지 시장 분위기를 달군다. 해가 서녘으로 기울 때쯤, 먹거리 가게는 손님 모시기에 분주하다. 노점상 과일과 채소류, 해산물도 분위기에 덩달아 여기저기서 “헐타! 싸다! 공짜다!” 떨이를 외친다.

시장 초입에서부터 실내·외 대폿집에서 뿜어내는 안주용 양념돼지고기, 닭고기 굽는 냄새가 이 시장에서 압권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성싶다. 대형 연탄 난롯불에 지글지글 타는 석쇠불고기 냄새는 오가는 이의 눈길, 발길을 꽉 붙잡는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대여섯 집이 있는데 하나같이 화덕은 바깥에 있다. 후각, 미각, 시각 등 감각 기능의 효과를 최대로 노린 기발한 상술이다.

반쯤 찌그러진 양은주전자와 술잔은 옛날 추억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막걸리 한잔 성급히 쭈욱 들이키고, 상추 잎에 불고기 한 점, 마늘, 고추 한 쪽씩 꾹꾹 눌러 싸서 볼이 미어터지도록 씹어야 하루의 삶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맛에 취하고 정에 취해야 시장 볼일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맛은 두말할 것 없고 값이 저렴해서 더 좋다. 닷새마다 찾아오는 고객들 얇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주인장의 넉넉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반야월장은 물건을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삶을 노래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정치도 종교도 이념도 모른다. 종일 차가운 길바닥 깔고 앉아 손톱 밑이 쓰리도록 마늘 껍질 벗기는 그들의 무거운 몸짓, 투박한 손길에서 따뜻한 이야기가 나오고 정이 만들어진다. 모두가 이웃 형님, 형수, 누나 같다. 장바닥에 널린 팍팍한 삶과 애환도 이해하고 배려하면 웃음이 되고 행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