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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벼꽃이 피었습니다 / 김영란

벼꽃이 피었습니다 / 김영란

 

 

벼꽃이 피었다. 대서가 지나자 111년 만의 더위라는 수식어가 붙은 올여름에도 변함없이 작고 하얀 꽃은 피었다. 논에 갔다 오는 남편이 밝은 목소리로 이삭이 팼다고 한다.

"벌써? 벼꽃이 피었으니 이제 가을이네. 그런데 당신은 왜 벼꽃을 이삭이라고 해?"

남편은 이른 가을 소식에 복중 무더위쯤이야 잊은 듯이 즐거워하는 나를 '농사꾼 마누라 몇 년인데 아직도 이삭하고 벼꽃을…'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삭은 꽃이 아니라 열매네요. 꽃은 이삭하고 같이 펴서 하루나 이틀 지나면 져. 농사꾼은 꽃이 아니라 이삭이 보이고. 그러니까 이삭이 팬다고 하지. 나갑시다. 벼꽃을 직접 봐야지."

그 수많은 이삭들은 내게 꽃이었는데 이제서야 벼꽃과 이삭이 다름을 알았다. 시골살이 스무해가 넘는 동안, 무지해서였든 무관심해서였든 간에 얼치기 농부 아내는 민망함을 웃음으로 넘기며 얼른 따라나섰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뜨거운 열기는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곡식들은 축 늘어졌다. 비가 온 지가 언제인지도 잊어버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들판에 한껏 목청 커진 매미소리 사이로 오토바이 소리가 바쁘다. 수로 바닥에 붙어 흐르는 물이라도 얻을 요량으로 물꼬를 트니 졸졸거리며 논바닥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뜨듯해진 막걸리만치나 텁텁하다.

농사꾼이 아니면 피는 줄도 모른다더니 역시나 내 눈에는 꽃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이삭이 패지 않은 옆 논에 비해 조금 희끗희끗할 뿐이다. 남편이 논두렁을 둘러보는 사이 쪼그리고 앉아 벼꽃을 살폈다. 파릇한 이삭의 빈 알갱이 사이, 가늘고 투명한 낚싯줄 같은 대궁에 깨알 같은 하얀 꽃잎이 갸름하니 달렸다. 꽃이라기보다는 여느 꽃의 꽃술처럼 생겼다. 제대로 꽃이라 불리지도 못하지만 이삭을 옹골차게 영글게 하는 귀하디귀한 꽃이다. 이삭을 위한 꽃, 그래서 벼꽃이 핀다고 하기보다는 이삭이 팬다는 표현이 더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잠자리가 이삭 위에 내려앉는다. 살며시 다가가는 둔한 손길을 느꼈는지 포르르 날아간다. 노란 장화를 신고 아빠와 함께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던 다섯 살 꼬마는 대학생이 되더니 고3 때보다 더 얼굴 보기 힘들고, 대학 졸업 반 딸은 111년 만이라는 폭염과도 같은 취업 전쟁에 뛰어들어 땀 범벅이다. 복지관에 나가기 시작한 어머니는 매일 아침 가기 싫다며 아버님과 실랑이를 하고 그런 어머니를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아버님의 발걸음은 무겁고 지쳐있다. 나는 유난히 더운 여름을 갱년기 탓으로 돌리며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로 떠나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열치열, 뜨거움엔 뜨거움으로 견디어 보리라. 옥수수와 감자를 한 솥 쪄서 단단하게 여문 옥수수 한 입, 포슬포슬한 감자 한 입에 더위를 베어 물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친구가 멈췄다.

"고시히카리는 이삭이 다 팼네?"

"응, 거의 다 팼어. 그런데 키가 너무 컸어. 작년에도 쓰러졌었는데."

"난 고시히카리는 안 할거야. 맛있으면 뭘해, 쓰러져서 수확이 적은데."

"그래도 어떻게 한 번 해보고 포기해? 삼세번, 내년까지는 해봐야지."

올해도 또 경험만 쌓이게 생겼다. 추석 밑에 바람이나 없어야 할 텐데.

경로당에서도 한낮 더위를 피해 모인 할머니들이 끌탕을 한다.

"올해는 왜 호박이 달리지도 않고 그나마 달리는 건 돌덩이같이 단단해? 호박만두 한 번을 못 해 먹었어."

"어디, 호박만 그래? 콩밭엔 가기도 싫어. 이 더위에 죽도록 풀을 맸는데 죽은 게 더 많아. 콩 축제에 내보낼 것도 없겠어. 먹을 거나하면 다행이야."

"그래도 재작년 가뭄보다야 낫지. 그때는 모도 못 낸 집 많았잖아?"

검게 그을린 주름진 얼굴들, 누구 하나 환하게 웃음이 없다. 하늘만 바라보는 밭은 허옇게 말라 돌덩이가 되어 버렸고, 한창 꽃이 필 콩, 팥, 녹두가 가뭄에, 뜨거움에 꽃은커녕 죽어가고 있다. 저마다 내쉬는 뜨거운 한숨이 수은주 눈금 한 칸은 더 올릴 듯하다. 소나기 같은 푸념들을 한바탕 쏟아내는 사이 창문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하나둘 일어선다.

"고추밭에 가봐야지. 콩밭에서 가보고, 깨밭에도 가봐야 하고."

혹시나 하던 비 소식은 물 건너가고 사람 키만 한 물통을 실은 차들이 늘어난다.

들판에는 대남, 대북 방송 대신 매미 울음소리가 짱짱하게 울려 퍼지고 올라간 수은주는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습기 하나 없는 건조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남편은 이삭이 팼다고 하고 나는 벼꽃이 피어다고 하는 하루가 또 피었다 졌다.

 

※ 정전 65년, 동네 나이 65세, 7월 27일 정전 기념일은 연내 추진 중인 종전선언 소식에 묻혀 소리 소문 없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