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푸른 보행을 그리다 / 장금식 푸른 보행을 그리다 / 장금식 직립보행과 직각 보행. '직립'과 '직각'의 앞 글자는 같으나 '립'이 '각'으로 변했다. 립과 각 사이엔 세월의 그림자가 두껍다. 꼿꼿이 서 있다가 조금씩 아래로 굽힌 것이 그만 기역 자, 낫 모양이 되었다. 어머니의 모습이다. 수직에서 예각을 거쳐 직각에 이르기까지 허리는 말이 없다. 깊은 침묵은 내 언어를 줄이다, 끊어버리다, 사라지게 한다. 어머니의 82세 생신을 맞아 고향 집에 갔다. 어머니는 지난겨울 새벽 기도를 가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 굽은 허리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얼굴에 내려앉은 주름은 더 깊어졌고 통증으로 주저앉은 허리는 웃음을 앗아갔다. 생신이 지나고 얼마 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똑바로 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여.. [좋은수필]물의 뿌리 / 제은숙 물의 뿌리 / 제은숙 잠잠한 호수를 내려다본다.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처럼 물 한 그루가 천천히 흔들린다. 진흙 깊숙이 발을 걸고 굵은 둥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지 끝 어린 물 잎사귀들만 바람 소리에 화답한다. 저토록 푸른 물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을까. 쉽사리 속내를 보인 적이 없기에 겹겹의 결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깊은 바닥에 어떤 마음으로 가라앉았는지 짐작할 수 없다. 얼마나 웅숭깊이 뿌리내려야 저렇듯 고요한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대지 속에 물의 씨앗이 잠들어 있었다. 껍질이 열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물길을 내고 굽이쳐 흘러 금세 거대한 물웅덩이가 되었을 터. 어쩔 수 없이 삼킨 무명들과 어쩌지 못해 뛰어든 이름들을 품으며 살아온 시간. 호수의 생이란 그저 마르지 않기 위해 .. [좋은수필]반포지효反哺之孝 / 이병식 반포지효反哺之孝 / 이병식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이 훤하게 밝다. 커튼을 밀어내고 밖을 내다보니 주위의 건물들과 도시 풍경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라 일본의 어느 호텔 방이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여행을 왔다. 눈을 일찍 떴기에 아침 식사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답답한 방에 있는 것보다는 호텔 근처라도 한 바퀴 돌고 싶어 아이들을 남겨놓고 아내와 함께 숙소를 빠져나왔다. 호텔 앞으로는 바닷물이 통하는 폭이 넓지 않은 운하가 있고 다리를 잠깐 건너면 소공원이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시원한 아침 바람을 쐬고 들어오기로 했다. 공원의 긴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니 맑은 가을 하늘에 햇살이 영롱하다. 저만치 떨어진 의자에는 노숙 노인들이 잠에서 깨어 침구를 정리하고 있다. .. [좋은수필]해거리 / 김옥한 해거리 / 김옥한 실팍한 가지에 감들이 듬성듬성 매달려 있다. 이파리 사이로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수다를 떤다. 작년에는 가지가 안쓰러울 정도로 열리더니 올해는 잎만 무성하다. 해거리를 하는 나무가 왠지 낯설어 한참을 쳐다본다. 시댁은 큰 감나무 열 그루가 집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감나무집이라 불렸다. 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가지가 찢어질 정도라 장대로 받쳐주곤 했다. 팔아서 살림에 보태기도 하고 곶감을 만들어 선물도 하였지만 올해는 해거리로 까치밥을 걱정할 정도이다. 해거리는 과실수에 과일이 많이 열리는 해와 아주 적게 열리는 해가 교대로 반복해서 나타는 현상을 말한다. 격년결과隔年結果라고도 하는데 특히 감나무에서 잘 일어난다. 나무는 한 해 풍성하게 결실을 맺으면 다음 해엔 지친 줄기나 .. [좋은수필]참외는 참 외롭다 / 김서령 참외는 참 외롭다 / 김서령 참외의 '외'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외아들·외딴집 할 때의 그 '외'다. 영어로도 참외는 'me-lone'이다. “Are you lonesome tonight?” 할 때의 그 'lone'이니 역시 '혼자'라는 뜻이다. 한자의 외로울 고孤자에도 참외 하나瓜가 들어앉아 이쪽을 말갛게 건너다본다. 우리말과 영어, 한자를 만든 이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한 것도 아니련만 '혼자'라는 의미에 똑같이 '외'라는 과일을 사용한 건 희한한 일이다. '슬기'가 '슬기-롭다'가 되고 '지혜'가 '지혜-롭다'가 되는 우리말 구조를 따져보면 '외-롭다'는 '외'로부터 나온 게 확실하다. 그들은 왜 '외로움'이란 의미를 밭에 돋아 홀로 열매가 굵어가는 저 보잘것없는 초본식물로부터 만들어 냈을까. .. [좋은수필]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 조정은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 조정은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장으로 갔다. 석 달 만의 외출이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씩씩하게 걸으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모든 것이 낯설어 걸음이 자꾸 허방을 짚었다. 십수 년을 살아온 이 거리가 이렇게 낯설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낯설었다. 생선 가게를 기웃거리는데 누가 내 팔을 툭 쳤다. 전에 근처에서 비디오 가게를 하던 형님이었다. 그녀는 몇 년 전 이혼을 했는데, 그때 이미 가게마저 남편의 빚잔치로 넘어간 다음이라 갈 곳이 없었다. 한 겨울, 불도 들지 않는 우리 집 지하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말없이 사라졌다. 어디 가서 죽었으면 어째? 한동안 걱정을 많이 했다. “아니, 형님! 살아 있었수?” “그럼, 나야 잘 지내지.” 그녀는 근.. [좋은수필]인연 / 김정순 인연 / 김정순 좋은 인연 만나기를 바라며 하루를 연다. 이미 맺은 인연도 변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오늘은 도서관에 강좌를 들으러 가는 날이다. 같은 취미를 갖은 사람들이 모이니 신난다. 이야기의 방향도 생각의 접점도 같거나 비슷해 갈등이 적다. 젊은 사람에서 중년, 노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하지만, 모난 돌처럼 뾰족한 이가 없다. 우리는 선생님께 좋은 강의도 듣고 제출한 습작을 토론한다. 하나의 작품이 창조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글쓴이는 자기중심적 감성에 사로잡혀 무엇이 잘못 된지를 알지 못하고 쓸 때가 많다. 글쓴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티끌들이 타인의 눈을 통하여 걸러진다. 내가 쓴 초고는 어쩌면 허접한 쓰레기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냉철한 눈과 마음으로.. [좋은수필]녹 / 최영애 녹 / 최영애 오래전부터 건축공법에 관심을 가졌다. 독특하게 세워진 건물을 보면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바라본다. 엘리트 여자 건축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건축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자신이 건축한 대표 건물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건축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자신이 건축한 대표 건물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건축물 외관에 '내후강판'을 부착한 것이 특징이라 했다. 철판이 공기나 물과 접촉하면 산화작용이 일어나 쇠붙이의 표면에 녹이 생긴다. 녹이 슬면 강판은 더 강하고 단단하게 되어 철이 부식되는 것을 방지한다. 녹이 보호막이 되는 셈이다. 그녀 말에 따르면 녹이라는 새로운 건축자재로 개발된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질감과 색의 변화가 일어나므로 건축물을 보는 사람이 삶에 대한 기억과 건축의 .. 이전 1 ··· 15 16 17 18 19 20 21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