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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해거리 / 김옥한

해거리 / 김옥한

 

 

실팍한 가지에 감들이 듬성듬성 매달려 있다. 이파리 사이로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수다를 떤다. 작년에는 가지가 안쓰러울 정도로 열리더니 올해는 잎만 무성하다. 해거리를 하는 나무가 왠지 낯설어 한참을 쳐다본다.

시댁은 큰 감나무 열 그루가 집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감나무집이라 불렸다. 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가지가 찢어질 정도라 장대로 받쳐주곤 했다. 팔아서 살림에 보태기도 하고 곶감을 만들어 선물도 하였지만 올해는 해거리로 까치밥을 걱정할 정도이다.

해거리는 과실수에 과일이 많이 열리는 해와 아주 적게 열리는 해가 교대로 반복해서 나타는 현상을 말한다. 격년결과隔年結果라고도 하는데 특히 감나무에서 잘 일어난다. 나무는 한 해 풍성하게 결실을 맺으면 다음 해엔 지친 줄기나 뿌리를 쉬게 하면서 성장을 멈춘다. 해거리는 자신의 열매를 먹고사는 짐승의 개체 수도 조절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새삼 자연의 지혜가 슬기롭다.

스물여덟에 동갑내기 신랑을 만나 첫딸을 낳았다. 삼칠이 지나자 시어머니는 은근히 손자 타령을 늘어놓으며 성주단지에 매달렸다. 염원이 통했는지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달 만에 임신이 되어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았다. 정확히 열한 달 차이로 일 년에 아이 둘을 연거푸 낳은 것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손자의 건강이 부실할까 열 달 동안 음식도 챙겨주고 보약도 지어주었다. 하지만 쌍둥이 같은 연년생을 키우느라 몸과 마음이 힘든 적이 많았다. 해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나이 들수록 몸 여기저기에서 이상신호가 자주 온다.

옛사람들은 삶을 즐기며 살았다. 물질보다 정신적 풍요로움에 가치를 두었다. 운치 좋은 곳에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으며, 강에 배를 띄워 풍류를 즐겼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현대인들은 차츰 여유라는 단어를 잃어버렸다. 속도 경쟁으로 성장과 결과만 중시하게 되었다.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리면서 정신은 자꾸만 황폐해져 간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갖가지 ‘힐링’이 유행하고 있다.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882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백사십여 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미완성이다. 파격적인 디자인으로도 유명하지만 건물을 한 채 짓는 데 무려 한 세기를 훌쩍 넘겼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는 일생 동안 완성하지 못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급하지 않고 느긋하였다고 한다. 그의 장인 정신과 더불어 느림의 미학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엄마는 구 남매를 낳았다. 두 살 터울로 칠 남매를 낳고 아래 둘은 네 살, 여섯 살 터울을 두었다. 갈수록 몸이 회복되는 시간이 늦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자연의 이치는 참 오묘했다. 출산 후 수유 기간 동안은 달거리도 멈추며,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요즘처럼 먹을거리도 풍부하지 않던 시절에 자식을 주렁주렁 매달았지만 자연스런 해거리가 엄마의 건강을 지켜준 셈이다.

인도네시아 롬복을 여행한 적이 있다. 북적이는 여느 해변과는 달리 한적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드문드문 앉아 책을 읽거나 누워서 쉬고 있었다. 우리는 한곳이라도 더 보기 위해 바빴지만 그들은 몸과 마음을 함께 비우며, 오롯이 휴식을 휘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두고두고 부러워 언제 다시 한번 가서 그들처럼 푹 쉬었다 오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악보 사이에는 쉼표를 넣는다. 경쾌하고 빠른 곡도 쉼표는 필수 조건이다. 바이올린을 보관할 때도 현을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처럼 움켜쥐려면 손을 펴야 하고, 잔을 채우려면 비워야 한다. 오래 살 부부간에도 안식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른 바 ‘졸혼’이라는 것인데, 노년에 극단적 헤어짐을 선택하지 않고 혼인관계를 지속하면서 한 달에 두어 번 정기적 만남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땅도 지력을 많이 소모하는 작물을 재배한 뒤에는 반드시 휴경기를 두어 쉬게 한다. 농작물에 따라 연작을 하지 않고 다른 작물을 심는 윤작도 있다. 고구마 심었던 곳에 고추를 심고, 논에도 벼를 심지 않고 쉬게 하거나 다른 작품을 심는다. 산이나 관광 지도 동식물 훼손과 보존 차원에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 보호한다. 동물보호를 위하여 수렵도 몇 년에 한 번씩 허가를 해준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 쉼과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대체로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을 따졌다. 남들보다 높아지기를 원했고, 더 소유하기를 바랐다. 남편의 진급에 노심초사 매달렸으며, 아이들에겐 밤낮 공부만 강요했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불렀고, 끊임없이 채워도 만족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새삼 감나무 한 그루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는 걸 깨닫는다.

남은 날들은 쉼표를 많이 두고 싶다. 미뤄두었던 여행을 다니고 부산하기만 한 집안일도 설렁설렁 쉬어가면서 해야겠다. 아이들에 대한 욕심은 조금씩 내려놓으리라, 그러면 나의 감나무에도 알찬 열매가 맺히지 않을까.

새소리가 지나간 하늘을 쳐다본다. 나뭇가지에 걸린 구름이 한가로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텅 빈 듯한 감나무에서 오히려 평안함이 느껴진다. 한 생각 덜어내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