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완물상지玩物喪志 / 이윤기 완물상지玩物喪志 / 이윤기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수집하고는 하지요? 내게도 그런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표, 성냥, 수석, 도자기, 벼루 같은 걸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중에서 수석 수집이 취미인 친구는, 강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떤 수석 한 점을 1천만 원에 팔았다고 술을 사기도 했습니다. 수집가들에게 포위당하면, 나도 평생 뭘 하나 수집해 보아야겠다는 어줍지 못한 생각을 합니다만, 곧 포기해 버리고는 하지요. 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만 내게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지요.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뭘 수집하는 걸 좋아하기는 마찬가지군요. 미국의 한국인 중에는 영화 포스터를 수집하는 사람, 카메라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한국인이 숟가락을 수집하고 있는 걸 보고, 어릴 .. [좋은수필]운명을 훔치다 / 안정혜 운명을 훔치다 / 안정혜 아홉 살이던 가을, 나는 아는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물건을 집어 온 일이 있다. 며칠 후 그 집 어른들은 용케도 그것을 찾으러 우리 집에 왔다. 그때 죄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바로 내드리고 나서도 울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양심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정말 그게 나쁜 짓인지 몰랐을까. 엄마한테 그 일로 매를 맞은 기억이 없다.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엄마는 엄히 타일러 주는 것으로 끝냈다. 동생이 보고 있었지만 부끄러운지 전혀 몰랐다. 그 나이 되도록 피란 다니느라 학교가 무엇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앞으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전염병이 무섭다고 피난민 학교에 안 보내 주니 학교는 무서운 곳인 줄만 알았다. 이름자는 물론 아라비아 숫자도 읽.. [좋은수필]극락조 / 조정은 극락조 / 조정은 어머니께서 임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택시를 탔습니다. 제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죄스러웠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외조부모를 다 여읜 어머니가 열세 살 어린 나이로 시집을 와서 칠십 년 남짓한 저희 집안과의 인연을 끊고 떠나신 것입니다. 당신 살아온 얘기는 소설을 써도 수십 권이라면서 한이 많으셨던 분이십니다. 그 분의 한 많은 생을 반추해 보려고 했습니다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엄마, 봄이에요. 개나리가 피려고 하나 봐요. 한강변에 개나리 가지가 모두 부풀었어요. 어머, 저기는 목련 한 송이가 벙그러졌네요. 엄마,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요. 엄마가 그랬었지요. 어디 가서 당사주를 봤더니 전생에 옥황상제 따님이었다고,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와서 죄 .. [좋은수필]누워서 본 세상 / 김길영 누워서 본 세상 / 김길영 한티 재에서 파계 봉으로 오르다가 되돌아오는 산행이었다. 하산 마지막 계단 몇 개를 남겨놓고 잔설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찌나 아프던지 내 몸이 두 동강 나는 줄 알았다. 동행한 일행들의 걱정을 덜어주려면 참아야 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주사를 맞았다. 첫날밤은 별일 없이 잠을 푹 잤다. 아마 약효 때문이었으리라. 다음날 아침 아내의 근심 어린 눈빛을 피해 병원엘 들렸다. 한 달 정도 치료하면 회복될 것이라 했다. 대수롭지 않게 흘린 의사의 말 한마디에도 위로가 되었다. 의사의 말과는 달리 견딜 수 없을 만큼 허리가 아팠다.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일 때면 상하체가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양손으로 엉덩이를 감싸들어 올려야 했다.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안.. [좋은수필]오만과 독단의 성(城) / 신정근 오만과 독단의 성(城) / 신정근 삼월의 마카사르는 어느 시인이 언급한 사월 못지않게 잔인한 달이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다가도 갑자기 억수같이 폭우가 쏟아지는 도시 속에서 이방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변화무쌍한 날씨와는 반대로 변함없는 것은 하루 다섯 번씩 제 시간마다 온 도시에 울려 퍼지는 이슬람 사원의 기도소리뿐이다. 나는 얼마 전 개인전을 끝내고 벌써 몇 달째 그림도 그리지 않고, 글도 읽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으며, 따분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도저히 심심하여 견딜 수 없는 날이면 몇 편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사실 단순히 몇 편이라기보다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려 16편의 영화를 봤으니 거의 중독적으로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흥미.. [좋은수필]아파트 열쇠 / 이병식 아파트 열쇠 / 이병식 나 홀로 아파트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유월 초순에 내리는 비가 봄비처럼 촉촉하다. 아내는 조금 전에 친구를 만난다고 우산을 들고 나갔다. 건물 어딘가에 모여 흐르던 빗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닥또닥 방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같다. 나는 찰싹거리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옛 생각에 잠긴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 없는 설움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았다. 우리 가족은 한국전쟁 중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먹고사는 것에 급급한 삶이었다. 그러다가 정착한 곳은 인천 앞바다의 조그만 섬이었다. 어떻게 집을 장만하였는지 몰라도 우리는 단칸방의 초가가 우리 집이었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집이 작고 초라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밖에서 뛰.. [좋은수필]키 / 윤근택 키 / 윤근택 어제는 경산 전통시장에서 ‘키’를 하나 샀다. 용케도 그곳에 키가 있었다. 그걸 만드는 품과 정성에 비해 비교적 싸다는 걸 느꼈다. 아마 그것조차도 인건비가 싸다는 중국산인지 모르겠다. 사실 그것까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계절적으로 가을이고, 올해는 평년보다 더 욕심부려 들깨를 밭 네 뙈기, 연면적 1000여 평 심었으니, 수확 때에 낟곡 들깨를 까불러댈 키가 하나 더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내 농막에는 이미 키 하나가 걸려 있고, 아내가 해마다 그 키를 잘도 써오고 있으나, 나도 올해는 키질을 거들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리 했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 가운데에서 혹여‘키’가 어떤 농기구를 일컫는지도 모르는 분이 계실까 싶어, 친절히 알려드려야겠다. 키란,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 [좋은수필]막 잠 / 류영택 막 잠 / 류영택 잠실(蠶室)잠실(蠶室) 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누에가 잠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 탈피(脫皮)였다. 무상에 빠진 듯 상체를 치켜세운 채 잠든 누에의 모습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의 서러움 같았다. 지금은 일부러 구경을 하려 해도 누에 치는 것을 보기 힘들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누에를 치는 집이 많았다. 누에는 봄과 가을, 춘잠(春蠶)과 추잠(秋蠶) 두 번을 칠 수가 있다. 밭농사보다 고생은 될지 몰라도 잘만하면 제법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농사대신 누에치기를 전업으로 하는 농가도 있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야산에 뽕나무를 심고, 잠실을 지어 누에를 쳤다. 하지만 대개의 가정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밭둑에 심어놓은 뽕나무로는 반장 정도의 누에를 치는 게 고..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