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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극락조 / 조정은

극락조 / 조정은

 

 

어머니께서 임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택시를 탔습니다. 제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죄스러웠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외조부모를 다 여읜 어머니가 열세 살 어린 나이로 시집을 와서 칠십 년 남짓한 저희 집안과의 인연을 끊고 떠나신 것입니다. 당신 살아온 얘기는 소설을 써도 수십 권이라면서 한이 많으셨던 분이십니다. 그 분의 한 많은 생을 반추해 보려고 했습니다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엄마, 봄이에요. 개나리가 피려고 하나 봐요. 한강변에 개나리 가지가 모두 부풀었어요. 어머, 저기는 목련 한 송이가 벙그러졌네요. 엄마,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요. 엄마가 그랬었지요. 어디 가서 당사주를 봤더니 전생에 옥황상제 따님이었다고,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와서 죄 닦고 가는 거라고. 엄마, 전 믿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하늘나라로 가시는 날 이렇게 화창한 걸 보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마치 어머니가 옆자리에 계신 것처럼 그런 얘기들을 주저리주저리 지껄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향집을 정리하고 한 오 년 동안 어머니는 저희 집에 계셨어요. 처음에는 관절염으로 앉거나 일어서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을 잘 못하더니 한 삼 년 후부터 아예 거동을 못하시고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전 그런 어머니가 부담스러워 매사에 더 툴툴거리곤 했는데 남편과 아이들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저녁이면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문방구에도 가고, 시장에도 가고, 가끔씩 한강이나 올림픽 공원에도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사위와 손주들에게 둘러쌓여 행진을 하시면서 당신 손수 시장도 보고 아이들 주전부리도 사시곤 했지요. 하지만 간혹 손주들이 효손이다, 사위가 착하다는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 어머니는 꼭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잠깐 딸네 집에 댕기러 왔슈. 아들도 친손주도 다 효성스러워유."

그냥 사위 기도 좀 살릴 겸 그렇다고 참 사위나 손주들이 더없이 고맙고 착하다고 해주시지, 전 또 그게 불만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딸네 집에 계신 것에 왜 당당하지 못하신지도 저는 늘 불만이었습니다. 시어른 제사가 닥치면 안절부절못하면서 방문을 닫고 나오지도 않으시던 어머니였습니다. 바보 같이, 정말 바보 같이. 그래서 저는 자주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년 전 어머니는 결국 저희 집을 떠나 오빠댁으로 가셨어요.

생전의 아버지께는 늘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던 어머니가 저희 집에 와서 말을 바꾸셨습니다. 다시 한 번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제 딸아이처럼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보고 싶답니다, 글쎄. 그때는 그것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렸어요.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납니다. 어머닌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선명한 게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 있기야 하지요. 어머니가 다섯 살에 계모를 맞아 늘상 지청구를 들으며 자랄 때,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던 아버진 그저 이름만 아버지였다는군요. 어머니의 너무 외로운 그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면서 자꾸 가슴이 아팠습니다.

"엄마, 그러세요. 다음 생에는 꼭 화목하고 부유한 집안에 귀한 딸로 태어나서 부모님 사랑 충분히 받고, 당당하게 잘난 신랑 골라서 시집가고, 알뜰살뜰 다정다감한 남편 보살핌도 받고, 똑똑하고 유순한 자식도 두고.. 엄마, 저도 엄마가 그런 생을 한 번 살아보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당신의 삶에 만족스럽지 못한 게 너무 많으셨습니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사연이 많지만 저는 때때로 어머닐 의심했습니다. 자족할 수 있는 것에서도 교묘하게 불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가. 무덤덤하고 평범한 아버지도 불만이었고, 드러나게 똑똑하지 못한 자식들도 탐탁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욕심이 제겐 벅차고 짜증스러웠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뉘라서 불만 없이 살겠습니까? 제가 갖는 당신을 향한 불만도 결국 지나고 보니 제 꾀에 제가 속은, 비천한 상상의 부산물에 불과하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군요.

어머니는 제 인생에 화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분이 기뻐하실 때도, 슬퍼하실 때도, 화를 내실 때도, 칭찬을 하실 때도, 의심하곤 했습니다.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먼 존재. 제게 어머니는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화를 내고, 뜻을 같이 하지 못한 죄, 이제 씻을 길이 없습니다.

어머니 영전에서 지장경을 읽었습니다. 광목이라는 처녀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고 가택을 팔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 대목에서 저는 통곡했습니다. 제게는 팔 가택도 없고 돌아가신 어머니만을 위하여 기도에 전념할 여유도 없이 인연의 사슬에 얽혀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초상을 치르고 출근을 하니 '연등'지 도교스님께서 지장경 한 권을 보내오셨더군요.. 저는 어머니의 부음을 제 주변의 아무에게도 알린 일이 없습니다. 워낙 손이 번창하신 어른이라 저 한 사람쯤 조문을 청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그보다 어머니와 이제라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속내를 얘기하고픈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먼 데 계신 스님이 어찌 아셨을까 의아했습니다. 인사를 드리려고 전화를 했더니 스님은 그냥 제게 그것을 급히 보내고 싶으시더랍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 영전에서 지장경을 읽으면서 드나들던 생각들을 이야기했어요. 스님은 껄껄 웃으시면서 49재를 당신께서 모시겠다는 거예요. 가택을 안 팔아도 되고, 가족을 등한히 하며 기도에 전념하지 않아도 그냥 마음만 진실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보내주신 경을 새벽마다 모시기 시작했으나 5주가 지나자 지치고 말았습니다.

근무를 할 수 없을 만큼 몸에 기운이 빠져 경 모시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막재에 스님이 계신 울산 통천사로 갔습니다. 처음 가 본 곳입니다. 대운산 자락 절벽을 이룬 곳에 통천사는 선비 같은 기품의 적송 몇 그루를 거느리고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절벽을 끼고도는 회야강에는 문득문득 마당바위가 강심을 가르며 떠 있고, 왜가리가 소나무 가지에 앉아 먼 데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스님을 뵌 것은 7년 전에 '연등'지에 제 수필을 올리기 시작한 때 딱 한 번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간단히 저녁식사를 한 것뿐이어서 그분의 모습조차 가물가물한데 무슨 인연이었을까요? 이레마다 재를 올리셨다는 공양주 보살의 말을 듣고 저는 더욱 놀랐습니다. 재는 거의 다섯 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위패와 유품을 태우고 복도 벗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알맞은 행사였겠지만 제게는 너무나 과분하고 성대했습니다.

절에서 돌아온 그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큰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오르면서 천지가 진동하도록 우렁우렁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깃털이 흑장미 잎처럼 붉고 보드라워 보였습니다. 꿈을 깨면서 저는 "극락조야, 극락조였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몽롱하던 의식이 명료해지면서 전 어머니를 부르며 흐느꼈습니다. 제가 왜 우는지 전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닐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만 그분을 꼭 안아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더라도 그냥 한 번만..

극락조! 그 새는 어머니의 영혼을 이끌고 갈 길잡이였을까요? 어머니와의 모든 추억이 꿈속 같습니다. 이상한 인연으로 두 번째 뵙게 된 스님도 현실 속의 인물 같지가 않고, 어쩌면 제 아이나 남편도 꿈속의 사람들은 아닐까요? 제가 ''라고 고집하는 이 모든 의식이 다 꿈이 아닐는지.

극락조가 이상한 소리로 뭔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던 것을 저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라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기도였겠지요?

제가 어머니라고 느꼈던 존재는 어쩌면 제 욕망의 투영이었을 뿐, 결국 저는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가까운 곳에 계신 그분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