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열쇠 / 이병식
나 홀로 아파트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유월 초순에 내리는 비가 봄비처럼 촉촉하다. 아내는 조금 전에 친구를 만난다고 우산을 들고 나갔다. 건물 어딘가에 모여 흐르던 빗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닥또닥 방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같다. 나는 찰싹거리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옛 생각에 잠긴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 없는 설움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았다. 우리 가족은 한국전쟁 중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먹고사는 것에 급급한 삶이었다. 그러다가 정착한 곳은 인천 앞바다의 조그만 섬이었다. 어떻게 집을 장만하였는지 몰라도 우리는 단칸방의 초가가 우리 집이었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집이 작고 초라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밖에서 뛰어놀다가 날이 저물어 새들이 보금자리를 찾듯, 들어가 쉴 곳이 있는 것에 만족했다. 몇 년을 그렇게 살다가 새 삶을 찾아 도시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온 식구가 함께 거처할 공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큰 누님과 조카와 나는 섬에 남아 한참을 더 지난 후에야 식구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부모님과 만나는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만, 그때 나는 집을 보고 더 놀랐다. 그것은 집이 아니었다. 차라리 길가에 임시방편으로 지어놓은 움막이라 하는 게 맞는 말이었다. 자동차 소리가 날 때는 실수하여 들이받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비가 오는 날에는 여기저기 그릇을 받쳐놓고 빗물을 받아야 했다. 그때 떨어지는 빗소리는 정감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후 판잣집으로 고쳐 지었는데 밤에는 판자의 옹이구멍 사이로 하얀 달빛이 새들어왔다. 겨울에는 바깥의 찬 공기가 그대로 피부에 닿는 듯 차가웠다.
도로 정비를 한다고 집을 철거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대 식구를 이끌고 갈 수 있는 마땅한 집이 없는 부모님은 늘 한숨이었다. 그러나 철부지인 나는 걱정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판잣집을 벗어나는 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셋방살이가 시작되었다. 우리 능력으로는 방 한 칸짜리 밖에 갈 곳이 없었다. 식구가 많아 방을 얻기도 힘들었고 주인의 눈치를 보며 들락거려야 했다. 셋방살이는 외견상 집은 좋아 보였지만 오히려 길가의 판잣집이 그리웠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과 육 남매가 어떻게 단칸방에서 살았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집은 보금자리다. 생활 터전으로 일하러 나가는 전초기지다. 편안히 하루를 쉬어야 일터로 나가 힘을 쓸 수가 있다. 셋방살이로 몇 번을 이사 다녔을까. 드디어 우리도 집이 생겼다. 내핍생활을 이어오며 판잣집을 하나 구했다. 우리 집이라는 게 좋았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 후 판잣집은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군대에 갔고, 제대 후 고향을 떠나 직장을 얻어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그 후 결혼해서 양육해야 할 아이들이 생겼다. 식구들이 거처할 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누구의 경제적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내가 집을 갖는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세상은 변해 아파트가 우후죽순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거환경이 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었다. 나도 아파트 구매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아파트 분양 1순위가 되어야 했다. 주택청약통장을 만들어 일정액이 될 때까지 입금한 후에도 몇 년을 기다렸다. 그래도 분양권을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사람들은 대학 입시보다 더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눈만 뜨면 아파트 분양 정보를 알기 위해 이리저리 발품을 팔았다. 드디어 아내가 아파트 당첨 소식을 전해왔다. 게다가 회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입주까지는 해를 넘겨 기다려야 했지만, 집 걱정을 덜었다는 마음에 흡족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집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은 아파트 분양가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빚으로 충당한다 해도 이자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천우신조랄까, 마침 회사에 주택자금 저리 융자 제도가 생겼다. 절반의 소유권만 가지고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내 집이었다.
입주하기 위해 관리소에 들러 열쇠 꾸러미를 전달받았다. 처음 만져보는 내 집 열쇠의 차가운 감촉이 온몸을 전율케 했다. 따스함으로 전해지는 그 차가움이 얼마나 상쾌하던지. 불혹을 넘긴 지 몇 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들어가듯 현관문 열쇠를 돌렸다. 99칸 저택에 들어서는 대감의 마음인들 내 마음 같았으랴. 문 닫으면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 구중궁궐이라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한쪽에선 냉수가 나오고 다른 쪽에선 온수가 나오는 수도. 중앙집중식 난방 시스템도 좋았지만, 아이들에게 공부방을 따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더 뿌듯했다. 내 어린 시절의 궁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가슴이 뜨거웠다.
손때에 윤색되어 반짝임이 은은한 아파트 열쇠가 가정의 보루같이 마음 든든하다. 봄비 촉촉이 내리는 날에 아파트 거실에 앉아 옛 생각에 잠기는 일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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