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 윤근택
어제는 경산 전통시장에서 ‘키’를 하나 샀다. 용케도 그곳에 키가 있었다. 그걸 만드는 품과 정성에 비해 비교적 싸다는 걸 느꼈다. 아마 그것조차도 인건비가 싸다는 중국산인지 모르겠다. 사실 그것까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계절적으로 가을이고, 올해는 평년보다 더 욕심부려 들깨를 밭 네 뙈기, 연면적 1000여 평 심었으니, 수확 때에 낟곡 들깨를 까불러댈 키가 하나 더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내 농막에는 이미 키 하나가 걸려 있고, 아내가 해마다 그 키를 잘도 써오고 있으나, 나도 올해는 키질을 거들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리 했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 가운데에서 혹여‘키’가 어떤 농기구를 일컫는지도 모르는 분이 계실까 싶어, 친절히 알려드려야겠다. 키란,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기구다. 이따가 상세히 알려드리겠지만, 주로 ‘키버들’로 엮어 만들게 되는데, 앞은 넓고 편편하고 마치 관모(官帽)의 날개인 듯 양 날개가 달렸다. 그 양 날개는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의 날개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옳다. 그리고 양손으로 잡게 될 뒷부분은 우긋하게 엮어 낟곡마저 밖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키버들로 엮어 키를 만들되, 그 바닥이 오돌토돌하도록 하여, 오로지 협잡물만 바깥으로 까불러내고, 낟알까지 바깥으로 딸려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 쪽에서는 이 ‘키’를‘챙이’라고 부른다. 지역에 따라서는 채·쳉이·치목·치매때·켕이·키짝·푸는체·치매 등으로 부른다고 한다.
키질은 꽤나 숙련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양손으로 ‘테’를 잡고 아래위로 널뛰듯 흔들어 까불되, 순간순간 가볍게 가볍게 테를 놓아주다시피 해야 한다. 즉 꽉 움켜잡고서 흔들어대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주 리드미컬해야 하고, 이따금씩 앞뒤로 추스리는 일도 빠뜨릴 수 없다. 타악기를 ‘트레몰로’로 연주하듯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뜻이다. 시골에서 자라나 어머니와 손위 누이들로부터 보고 배워서일까, 환갑을 맞은 이 농부도 아내의 솜씨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키질을 하는 편이다. 사실 요즘은 선풍기가 키질을 대신하는 예가 많아, 집집이 키가 다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이, 하마나 하마나 기다릴 키와 관련된 이야기도 하나 있다. 나처럼 시골에서 자라난 이들이라면, 오줌싸개 유년시절 새벽을 금세 떠올릴 것이다. 어머니는 내 키보다 큰 ‘키’를 마치 우의(雨衣)를 입히듯 씌우고, 소금 담은 종지를 한 손에 들려, 이 집 저 집 ‘소금 꾸러’보냈다. 참말로, 그 비방(秘方)을 ‘소금 꾸기’라고 했다.
“구평 아지매요, 소금 꾸러 왔니더.”
또래의 이쁜 ‘숙선’이한테 얼마나 부끄럽던지.
지금부터는 내가 위에서 잠시 미뤄두겠다고 했던, 키 재료로 쓰이는 ‘키버들’에 관한 이야기다. 웬만한 나의 애독자들께서는 워낙 나의 작품을 자주 읽어 아시겠지만, 나는 대학에서 임학(林學)을 전공한 이다. 전공필수과목이었던 ‘수목학(樹木學)’에 소개되었던 버드나무류는 온통 나를 헷갈리게 하였다. 버드나무과(-科)의 수목은 무려 3속 340여 종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에 키버들· 개키버들· 당키버들도 들어 있었다. 그 껍질을 벗겨 키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하여 ‘키버들’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또, 이 ‘키버들’을 ‘고리버들’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리’ 혹은 ‘고리짝’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하여 그러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는 거 아닌가. 학술적으로 들어가면, 꽤나 어려웠다. 키버들은 한반도 고유종이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 여타 버들과 식물이 잎이 어긋나는 데 비해, 키버들은 잎이 마주나는 게 특징이라고 하였다. 중간고사 문제에도 ‘키버들의 식별점은?’이 나왔으니까. 사실 이렇게 더 적었으면 A학점이 아니라 A+를 받았을 것이다.
‘다른 식물들보다 이른 봄에 꽃이 피기에, 봄을 알려주는 대표적 식물이 ‘키버들’임. 잎차례[葉序], 꽃차례[花序]로 따져, 잎 나오기 전에 꽃이 먼저 피고, 여러 줄기가 한 군데에서 다발로 나오기에 해마다 고리짝 재료로 베어 써도 이듬해 다시 다북다북 가지가 나옴. 즉 맹아력(萌芽力)이 뛰어남.’
키버들로 엮어 만든 도구에 관해 이야기를 더 보태야겠다. 키버들의 껍질을 벗긴 상태의 버들가지를 ‘고리’라고 하며, 그 ‘고리’로 엮어 만든 ‘반짇고리’나‘반짇고리’나 ‘떡당시기(떡고리)’를 줄여서 ‘고리’라고도 불렀다는 걸 내 애독자님들께 덤으로 알려드린다. 또, 그렇게 만든 도구를 ‘고로’·고리짝·유기(柳器) 등으로도 불렀다는 거. 그렇게 만든 ‘고리짝’에는 들기름을 입힌 한지(韓紙)로 치장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 많은 고리짝 가운데에서도 시월상달 시사(時祀) 때에 지게에 받쳐지고 가던 어른들의 떨당시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안에는 음복으로 온 마을 아이들한테 나눠줄 시루떡이며 주과포혜(酒果脯醯)가 담겨 있었으니... .
곧 나는 들깨밭에서 들깨를 찔 것이고, 그것들을 말려 타작을 할 것이다. 어제 산 키를 아주 유용하게 쓸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쓰게 될 키는 그 무엇도 아닌 키버들로 만들어졌다는 걸 다시 기억할 것이다. 가볍기도 하려니와 마디 없이 가지런하고 가는[細] 재질이라, 여타 재료로는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다시 느끼게 될 테지. 심지어, 키는 선풍기로도 대신 할 수 없는 효율적 기구임을. 나아가, 내가 몇몇 편의 기발표작에도 이미 소개했지만, 버드나무류는 인류에게 아주 특별한 약제(藥劑)도 주었다는 걸 다시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바로 독일 바이엘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아스피린’. 그 아스피린은, 물이 좋아 물가에 살기에 ‘Salix(그리스어로 ‘물을 좋아하는’의 뜻을 지님.)’이란 학명을 지닌 버드나무류의 껍질 추출물에서 얻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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