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김훈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 [좋은수필]노년의 비애悲哀 / 김정순 노년의 비애悲哀 / 김정순 황당한 일이었다. 절망이 곤두박질쳤다. 속상함도 사치였다.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린 채 멍해졌다. 내게 이런 기막힌 일이 생기다니? 불난 뒤의 매연처럼 소리 없이 스며들어 오염시키는 노년의 비애.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 불을 켰다. 물이 물방울을 뿜어 올리며 끓기 시작했다. 준비한 나물을 넣었다. 오줌이 마려운 신호가 살짝 왔다. 나물을 다 삶아 건져놓고 화장실을 가도 될 거라는 짐작을 했다. 그리 급한 요의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심한 재채기가 났다. 소변이 찔끔 고개를 내밀었다. 곧 숨어들겠지 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통까지 불쑥 밀고 나왔다. 못된 것은 내 의지의 한계를 넘어 나를 비웃듯 폭포로 쏟아졌다. ‘아! 이게 뭔가?’ 그 자리에 서서 망연자실했.. [좋은수필]구두와 나 / 최민자 구두와 나 / 최민자 구두를 샀다. 빨간 단화다. 강렬한 원색이 낮은 굽을 보완해 주어서인지 처음 신은 단화가 어색하지 않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줄기차게 7센티 굽을 고수했다. 무릎이 아프다고, 발목이 좋지 않다고, 진즉 편한 신발로 갈아탄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한사코 하이힐을 고집했다. 젊은 시절부터 습관화되어선지 신발이 낮으면 오히려 불편했다. 굽 낮은 신발을 신고 나갔다가 땅으로 푹 꺼지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 들어와 버린 적도 있다. 구두 굽이 높아지면 숨 쉬는 공기의 맛이 다르다. 턱을 치켜들고 등뼈를 곧추세워 또각또각 걷다 보면 마음 복판에도 철심이 박혀 자세가 한결 당당해진다.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아랫배에 힘이 쏠려 저물어 가는 여자의 곤고한 심신이 일시 탄성을 .. [좋은수필]집 비우던 날 / 김영관 집 비우던 날 / 김영관 밤비가 창 두드리는 소리에 베갯머리의 기억 열차가 순식간에 시공간을 초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뒤로의 궤도를 내 달렸다. 어머니 기록관이 가까워지자 열차는 속도를 줄였다. 저만치 어머니가 걸어온 고난의 길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는 철길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길은 한눈에 보아도 험했다. 좁고 가파른 바닥에는 돌멩이가 지천이었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청상과부로 어린 사형제를 태운 수레를 끌고 저 험한 언덕길을 어떻게 올라왔을까? 열차에서 내려 쉼 호흡으로 숨을 고르고 기록관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방은 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매캐한 소독 냄새가 몸과 마음을 짓뭉갰다. 병상으로 어정어정 걸어가 어머니를 내려다봤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깊은 주름이 한가득 고난의 삶이 서각.. [좋은수필]마른 갈대 / 김순경 마른 갈대 / 김순경 고개 숙인 마른 갈대가 강가에 서 있다. 아직도 강변 찬바람을 받으며 투구를 쓴 병사들처럼 줄지어 강어귀를 지키고 있다. 한겨울 바닷바람에 명태처럼 바짝 말랐지만 물기 하나 없는 빈껍데기 이삭과 누런 줄기는 자리를 뜰 줄 모른다. 갈대는 대나무가 아니다.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대나무처럼 굵거나 크지도 않고, 질기거나 강한 성질도 없으며, 마디에서 뻗어 나가 균형을 잡아주는 잔가지도 없다. 그렇다고 대나무처럼 대궁이가 썩지 않고 오랫동안 버티는 것도 아니다. 봄이면 잡풀처럼 수북이 올라왔다 가을이면 수명을 다하는 여러해살이 풀에 불과하다. 갈대는 어떤 척박한 땅도 쉽게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지만, 염치없이 아무 곳에나 발을 뻗지는 않는다. 누구도 찾지.. [좋은수필]인생 초보 / 이장희 인생 초보 / 이장희 ‘면허를 따긴 땄는데….’라는 문구에 웃음이 났다. 어느 날 신호 대기 중에 내 눈에 들어온 초보운전 차에 붙인 패찰을 보는 순간 마치 내 삶의 고백인 듯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휙휙 스쳐가는 차량을 살피며 쩔쩔매던 초보시절이 엊그제 같다. 시동을 꺼트리는가 하면 야무지게 주차하려다 전봇대를 박은 적도 있다. 남의 차에 긁혀 보상받고 돌아서서 다른 차를 스쳐 물어줘야 했을 때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짐칸 문 닫는 소리를 승차한 후 문 닫는 걸로 오인하고 출발해 아내를 다치게 한 실수는 두고두고 원망을 들었다. 초보라는 이실직고는 정직한 자기고백이며 하소연이 아닐까. 서툴기 때문에 양해를 바라는 방어수단이며 혹은 타인에게 피해주더라도 절대 고의가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다. 나 자신.. [좋은수필]정지선, 긋다 / 문경희 정지선, 긋다 / 문경희 산사의 일상은 속가에서 얽매이던 시계바늘의 행보와 다소는 무관하다. 모두가 잠든 시간, 한 발 앞서 새벽예불로 아침을 열었듯이 불야성의 예감으로 생의 기운이 더욱 펄펄해지는 저녁나절, 소찬소식의 겸손함으로 일찌감치 마지막 끼니를 해결한다. 산자락을 핥는 홍시빛 노을과 더불어 하루의 장막을 내려버린 절마당 평상에 네댓 명 식객들이 한갓지게 둘러앉는 것도 그즈음이다.. 으레 그러하듯, 소화도 시킬 겸 종일 외추처럼 묵직하게 걸쳤던 사찰의 사소 엄중한 분위기를 잠시 물리고 두런두런 한담이라도 주고받자는 것이다. 갑자기 한 처사님이 뒤란으로 돌아가더니 양손에 하얀 남자용 고무신 서너 켤레를 부채처럼 펼쳐 쥐고 나타나신다. 인심 좋게도 맘에 드는 걸로 골라 신으란다. 엊그제던가. 뒤꿈치를.. [좋은수필]파종 / 손훈영 파종 / 손훈영 도타운 햇살이 땅 속 생명들을 깨우고 있다. 바야흐로 텃밭 걸음이 잦아질 때다. 허름한 바지에 긴 장화를 신고 끈 달린 밀짚모자를 쓴 남편은 제법 농사꾼 티가 난다. 손에는 호미 한 자루 밖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텃밭지기 남편의 어엿한 조수, 제일 중요한 씨앗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뒤를 따른다. 산을 끼고 있는 아파트라 뒷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등산로 입구다. 그 어름에 작지만 윤기 나는 우리의 텃밭이 있다. 오른쪽 골에는 상추씨를 뿌리기로 한다. 왼쪽 골에는 쑥갓을 위쪽으로는 부추를 뿌리면 맞춤 맞을 것 같다. 적당한 간격으로 씨를 흘려 넣는다. 텃밭 가꾸기는 딱히 수확을 내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순전히 뿌리고 가꾸는 재미다. 조금씩 솎아 먹는 즐거움도 제법이지만 막 올라오는 새.. 이전 1 ··· 19 20 21 22 23 24 25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