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좋은수필]대추나무가 서 있는 집 / 정호경 대추나무가 서 있는 집 / 정호경 나에게 집을 옮긴다는 일은 언제나 별것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무슨 일이건 불쑥 겁 없이 잘 저질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여수로 내려갈 때도 이젠 한평생의 교직에서 퇴직을 했으니 아무것에도 구애받을 일이 없으니 남쪽 바다에 가서 낚시나 실컷 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나는 원래 몸이 약골인 데다 아버지에게로 시집오기 전 버스가 하루에 한 번밖에는 들어오지 않는 벽촌 출신인 나의 어머니를 닮은 멀미 선수이어서 조금만 파도가 일어도 창자가 뒤집히면서 순식간에 얼굴은 탱자 색깔로 변해버리니 평소에 볼그레한 사과 색깔을 자랑하던 내 안색은 순식간에 무색해지고 만다. 그래서 한바다의 어장에서 하는 배낚시를 포기하고 육지에서의 방파제防波堤..
[좋은수필]붉은 잠망의 시간 / 김옥한 붉은 잠망의 시간 / 김옥한 붉은 털실 매단 잠망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리본 묶은 갈래머리 계집애 같다. 구멍 숭숭 뚫린 망 사이로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다.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놓은 듯 거미줄이 어지럽다. 잠망은 왜 이제야 왔냐고 슬쩍 나무라는 듯하다. 붉은 리본 사이로 젊은 아버지가 빙그레 웃고 있다. 고향 집을 허문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길이었다. 집은 굴착기 앞에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양잠을 하여 학교만큼이나 큰 규모의 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십 년 동안 비어 있었다. 안방과 사랑방을 뒤지며 추억이 될 만한 물건들을 한데 모으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창고였다. 뜻밖에도 누에치던 물품들이 가득했다. 뽕을 잘게 썰던 뽕칼을 비롯하여 둥우리와 다래끼, 잠박과 잠망이 어지러이 널브러..
[좋은수필]챔파꽃 / 박금아 챔파꽃 / 박금아 미얀마 중부 아웅반 근교의 시골병원에서였다. 엔지오 활동을 하는 의사를 만나러 간 길이었다. 키 큰 꽃나무들이 기린의 목을 하고서 잿빛 하늘 속으로 고고히 꽃잎을 흩날리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도 꽃잎처럼 흩어져 있었다. 담벼락 꽃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소녀가 눈에 띄었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무릎에는 동생인 듯한 여자아기를 안고 있었다. 두어 살 정도로 보이는 아기는 머리털이 다 빠지고 이마에는 수술 자국인 듯한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온 듯, 소녀는 진초록 치마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은 교복차림 그대로였다. 자꾸만 눈길을 주는 소녀에게 씽긋 눈인사를 보냈다. 소녀도 살짝 웃었다. 약속시간을 기다리며 소녀에게로 다가가 보았다. 흘레바람이 꽃송이를..
[좋은수필]마 중사 / 김상영 마 중사 / 김상영 ‘마 순경’이 사라질 모양이다. 마 순경은 과속을 막으려 도로변에 설치한 가짜 경찰이다. 차가 내달릴만한 도로를 귀신같이 옮겨 다니며 근무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으로 서 있는 마 순경을 발견할 때면 머리끝이 쭈뼛 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을 실감한다. 마 순경을 차고 때려 분풀이를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이해가 간다. 가뜩이나 부대끼는 세상살이에 가짜에까지 골탕을 먹으니 오죽하랴. 경찰관서에서는 백성이 괴롭히고 관리마저 어려워 없애야겠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선글라스와 경광봉을 슬쩍해 가기도 한다니 심하긴 하다. 다시 착용시켜 봤자 기어이 손을 탄다는 데야 할 말 없고, 도로변이라 복장이 쉽게 지저분해질 테니 골치도 아팠겠다. 마 순경이 안전에..
[좋은수필]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은 천지의 기를 뚫고 나오는 것일까. 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온기가 돈다. 누리 가득한 초목의 새싹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입술 같은 봄이 얼굴을 뻘쭘히 내민다. 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수달래… 온갖 꽃들이 향기를 흩뿌려 남아 있는 냉기를 밀어낸다. 산새며 들짐승이며 사람들, 모든 생령들이 생기를 얻어 저마다의 몸짓에 힘이 넘친다. 마침내 초록 빛깔이 밀물마냥 번져와 온 산야를 물들였다. 나는 신록이 향연을 펼칠 때와 갈잎이 귀토의식을 마감할 무렵이면 광기를 참다못해 팔공산에 오른다. 산허리를 감도는 순환도를 따라 파계사 방향으로 걷고 있다. 오늘은 일요일. 상춘객과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웅장한 신록의 바다와 풋풋한 내음, 뛰어난 산세의 위용과 신묘한 산정기, 사..
[좋은수필]남해 물미해안 / 정목일 남해 물미해안 / 정목일 남해 물미해안에 와서 파도가 쏟아내는 말을 듣는다. 태고의 그리움이 밀려와 가슴을 적셔주는 바다의 말이다. 문득 바다를 보고 싶을 때 남해군 동면 물건마을에 간다. 초승달 모양의 물미해안이 펼쳐진 모습이 그리움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쌓아놓은 두 개의 방파제가 타원형으로 뻗쳐 있다. 바다 전망을 보면서 '물건마을'의 방조어부림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척에 바다를 둔 숲속 길은 절묘한 산책로이다. 논밭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 위해 조성한 이 숲은 수백 년 전에 조성되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산책하기는 이 숲 만한 곳이 어디 있으랴 싶다. 물미해안 숲속으로 혼자 걸어간다. 이 곳 수백 년 수령의 나무들과 처음 만난다. 바람과 눈비 속에서도 생명을 키워온 삶의 모습들이다. 나무들..
[좋은수필]찔레꽃 / 강천 찔레꽃 / 강천 언제쯤에 새겨졌던 기억일까. 아직도 코끝에 간직되어 있는 아련한 향기를 느끼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저만치 담장 한쪽 귀퉁이에서 언제 보아도 반가운 자태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간다. 찔레꽃 한 무리가 날 보라는 듯 소담하게 피어서 방실거리고 있다. 곁에 핀 장미처럼 크고 원색적이지는 않지만, 단출한 꽃잎만으로도 나의 눈길을 받기에는 차고 넘친다. 꾸미지 않은 소박함이 마치 화장기 없는 민낯의 소녀처럼 수수해 보여서 더욱 정겹다. 찔레꽃 앞에 서서 나는 까마득한 그림자로 남아있던 하얀 그리움 하나를 건져 냈다. 봄바람을 타고 흐르는 꽃향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논두렁을 보고, 파랗게 이삭을 내민 보리밭 위를 날아다닌다. 장독대 뒤에 숨어있는 까까머리 동무를 찾아내고, 꿩 울음소리가 ..
[좋은수필]솔기 / 박종희 솔기 / 박종희 어머니가 또, 옷을 벗었다. 밤 도깨비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숟가락질도 못 하시는 분이 단추가 달린 환자복을 술술 벗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인병원의 간병사는 "그러니 이곳에 계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건 괜찮은데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은 퍽 언짢은 표정이었다. 밤새 환자복과 실랑이하던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어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벗어놓은 환자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집힌 환자복의 솔기 부분이 내가 입어도 불편할 만큼 거칠었다. 수선이 필요 없는 환자복이라 그런지 겨우 솔기를 박을 수 있을 만큼 좁은 시접이 휘갑치기도 안 된 채 뭉쳐있었다. 그제서야 옷을 벗는 어머니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