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물미해안 / 정목일
남해 물미해안에 와서 파도가 쏟아내는 말을 듣는다. 태고의 그리움이 밀려와 가슴을 적셔주는 바다의 말이다.
문득 바다를 보고 싶을 때 남해군 동면 물건마을에 간다. 초승달 모양의 물미해안이 펼쳐진 모습이 그리움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쌓아놓은 두 개의 방파제가 타원형으로 뻗쳐 있다. 바다 전망을 보면서 '물건마을'의 방조어부림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척에 바다를 둔 숲속 길은 절묘한 산책로이다. 논밭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 위해 조성한 이 숲은 수백 년 전에 조성되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산책하기는 이 숲 만한 곳이 어디 있으랴 싶다.
물미해안 숲속으로 혼자 걸어간다. 이 곳 수백 년 수령의 나무들과 처음 만난다. 바람과 눈비 속에서도 생명을 키워온 삶의 모습들이다. 나무들마다 눈 맞춤으로 첫 만남의 인사를 나누며 걷는다. 바다를 바라보고 수백 년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란 나무들이다. 휘어지거나 구불구불 치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바닷가 숲속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걸으며, 고목古木들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다. 거목巨木들에 비하면 인간은 작은 아이처럼 보인다. 하늘로 치솟은 나무들이 품은 목리문木理紋엔 천 년 바람의 음향과 햇살의 체온과 빗방울의 무늬가 수놓아져 있으리라.
여름의 끝 무렵이지만, 숲속 길 위로 낙엽이 떨어져 있다. 숲속 사방에서 새들이 지저귄다. 사람이 출현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음이다. 새들에겐 숲속 침입자가 된 셈이다. 조용하던 숲속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버려 미안하기도 했다. 숲속 여기저기서 무슨 새인지, 주고받는 신호음이 왁자지껄하게 울려 퍼진다. 숲속의 평온을 깨트려 놓은 셈이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발걸음 소리를 줄인다. 수백년 자란 나무들과 만나며, 휘어지고 구불구불 치오른 모습들을 본다. 나무들이 뻗어 오른 선형線型을 살피며, 나이테에 새겨 두었을 세월과 삼의 체험들을 생각해 본다.
구불구불 곡선을 그으며 치올라 간 몇 백 년 넘은 팽나무, 쥐똥나무들을 본다. 숲속에서 가지들이 서로 구부러지면서 조화를 이뤄낸 모습에 감탄하고 만다. 수백 년이 지난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수백의 나이테를 그려놓았을 터이다. 오래 된 거목일수록 삶의 무게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숲속 한 곳에 자리 잡아 뿌리를 박고서, 수백 년간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갔을 거목巨木들을 생각한다. 비쩍 마른 몸매로 구불구불 치솟은 모감주나무, 푸근하고 넉넉해 보이는 푸조나무, 하얀 밥알을 단 이팝나무, 귀신에 홀린 사람을 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때려 귀신을 쫓아냈다는 무환자나무들에게 목례를 보낸다. 거목들을 보면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숲길을 지나친다.
바닷물과 바람을 막기 위해 옛 선조들이 조성한 천 년의 방풍림을 걸으며 무한의 바다과 하늘과 만난다. 생명의 숨결로 달려오는 바닷바람이 내 얼굴을 휘감으며 스쳐가곤 한다. 여기에 와서 천년의 파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만난다.
숲속에서 나오면 '물미해안'이다. 해변에는 수억 년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몽돌들이 널려 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돌들이 수없이 바다 속으로 밀려갔다가 해안으로 나오면서 깎이며 다듬어져 몽돌이 되어 널려 있다. 방풍림防風林 밖으로 나지막한 산, 그 너머 '마안도馬鞍島'가 보인다. 말의 안장처럼 생긴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말을 타고 바다를 달리는 광경을 떠올려 본다.
수백 년 방풍림과 물미해안…. 방파제와 등대 뒤쪽으로 다도해多島海가 희끄므레 보인다. 바다, 산, 숲, 하늘이 기막히게 어울린 선경仙境이다. 반원형의 내항內港에 방파제가 양쪽으로 뻗어 바닷물을 막아주고 있다. 방파제 끝에 1개씩 등대가 세워졌다. 내항엔 고깃배들이 10여 척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남해 물미해안은 바다, 하늘, 산, 숲이 어우러진 절경絶景, 대자연의 안식처인 듯싶다. 인위적인 장식이나 치장이 없다. 맑고 푸른 태고의 공간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따금 잊혀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물미해안 절경이 펼쳐지며 파도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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