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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찔레꽃 / 강천

찔레꽃 / 강천

 

 

언제쯤에 새겨졌던 기억일까. 아직도 코끝에 간직되어 있는 아련한 향기를 느끼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저만치 담장 한쪽 귀퉁이에서 언제 보아도 반가운 자태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간다. 찔레꽃 한 무리가 날 보라는 듯 소담하게 피어서 방실거리고 있다. 곁에 핀 장미처럼 크고 원색적이지는 않지만, 단출한 꽃잎만으로도 나의 눈길을 받기에는 차고 넘친다. 꾸미지 않은 소박함이 마치 화장기 없는 민낯의 소녀처럼 수수해 보여서 더욱 정겹다.

찔레꽃 앞에 서서 나는 까마득한 그림자로 남아있던 하얀 그리움 하나를 건져 냈다. 봄바람을 타고 흐르는 꽃향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논두렁을 보고, 파랗게 이삭을 내민 보리밭 위를 날아다닌다. 장독대 뒤에 숨어있는 까까머리 동무를 찾아내고, 꿩 울음소리가 늘어지는 마을 뒷동산에도 누워 본다. 나뭇짐을 지고 끙끙대었던 재 너머 길도 가보고, 양버들이 줄지어 서 있던 먼지 자욱한 신작로도 걷는다. 깜부기를 쑤욱 뽑아서 만들었던 보리피리의 단순하면서도 애잔한 가락이 귓전에서 맴돈다.

찔레의 새순을 따서 그리움을 씹어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줄기를 한 뼘 남짓 꺾어서는 톡톡 껍질을 벗긴다. 혀끝에 남아있는 달콤함을 기억하며 덥석 한 입을 깨문다. 호기로운 입놀림과는 달리 낯설게 전해져 오는 이런 들큼함이라니, 나무토막을 씹는 느낌에 화들짝 추억이 달아나고 만다. 그 시절의 찔레순은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둘도 없는 간식이었건만, 채 한 모금을 다 넘기지 못하고 뱉어버린다. 풀밭에서 한 움큼씩 뽑았던 삘기나, 솔가지의 껍질을 벗겨 씹었던 그 달착지근했던 맛이라고 어디 다를까. 마음으로 기억하는 그 맛을 다시 느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아서 왠지 서글퍼진다.

찔레꽃을 보고 있노라니 누님이 생각난다. 터울이 있으니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에는 이미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등교하는 누님이 입고 나서던 교복의 하얀 칼라가 아직도 선연하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것도 아닌, 그저 둥그스레한 옷깃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내 눈에는 더 없는 멋쟁이로 보였다. 새하얀 깃에 꽂힌 중학교의 배지는 또 얼마나 빛났던지, 꾸미지 않아도, 치장하지 않아도 저절로 빛난다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아무런 장식 없이도 빛나는 찔레꽃처럼 누님은 시골 마을에서 가장 빛나는 들꽃이었다.

찔레꽃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들판에 살지만, 아무에게나 손길을 허락지 않겠다는 자존의 상징일 것이다. 섣불리 나를 대하다가는 상처를 입기에 십상이니 만만히 보지 말라는 경고와 다름없다. 그러한 모습조차도 내게는 정겹게 다가온다. 막 이성을 알아 갈 무렵 동갑내기 여학생들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리라.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었지만, 가시를 세운 듯 날을 돋운 서슬에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늘 저만치서 바라만 보았다. 찔레에서는 열대여섯 살 시골 여학생처럼 새침하지만 풋풋한 연두색 향기가 난다.

오월의 신록 사이로 바람이 분다. 길섶에 선 풀잎마다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한껏 생명의 기운을 머금고 피어나는 들꽃 하나한가 신비롭고 대견하다. 보아주는 이 없어도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알아주는 이 없어도 모두 제 몫만큼의 삶을 살아간다. 과하여 탈이 나는 일도 없으며, 다투어 상하는 일도 없다. 저에게 주어진 생에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이 고와도 보인다. 찔레의 꽃잎처럼 티 없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래서 불만, 저래서 불평, 모자란 것들에만 얽매여 허둥대는 것이 현재의 내 모습이다. 더 가지려, 더 나아가려 안달복달하는 나를 향해 복에 겨운 투정일랑 부리지 말라고 오월의 찔레가 이리저리 고개를 내젓는다.

도심 담장에 살고 있는 이 꽃의 고향은 어디였을까. 저도 나처럼 타향살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나른한 햇살을 받으면서 발치 아래에 함께 살았던 민들레를 생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찔레꽃을 보면서 나는 고생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옛일들을 생각해 낸다. 푸르렀던 고향 들판과 순수했던 동무들이 절로 떠오른다. 그만큼 흔했던 탓일까. 아니면 때 묻지 않은 순박한 느낌 때문일까. 각지에서 각자의 처지대로 살아가고 있을 코흘리개들이 새삼 보고 싶어 진다.. 찔레꽃송이마다 발가벗은 그들의 이름을 붙여 불러 본다. 그리고 아주 영원히 먼 길을 떠나버린 친구의 이름까지도.

찔레꽃에서는 고향의 냄새가 난다. 찔레꽃에서는 그리움의 향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