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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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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땜질 / 이장희 땜질 / 이장희 군색한 솜씨로나마 땜질했더니 한결 개운하다. 붓으로 칠해 둥근 달처럼 오려 붙인 도안이 빛바랜 천정과 차이나도 그리 흉하진 않았다. 그끄저께 낡은 등을 새것으로 갈려는데 점등관부품들이 허물 벗듯 떨어졌다. 너무 낡아 일자형 램프로 통째 갈았더니 등에 가렸던 곳이 퇴색돼 너저분한 부분이라도 안 보이게 메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천정 일부를 종이로 땜질하다 보니 우리 삶이란 땜질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나긴 인생의 생로병사란 때우지 않고 헤쳐가기 힘든 여정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액땜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어떤 곳은 메우고 감싸고, 또 어떤 때에는 틀어막고 더러는 상한 부분을 갈아 끼우지 않는가. 어린 시절 납땜 일로 살아가는 땜장이를 보았다. 골목골..
[좋은수필]소리샘 / 김옥한 소리샘 / 김옥한 귀 안쪽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린다. 양철 부딪는 날카로운 소리 같기도 하고, 드르륵거리며 맷돌 돌아가는 소리도 난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아보고 고개를 흔들어 봐도 소용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이명과 더불어 청력도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옆 사람 이야기에 되묻는 횟수가 잦아졌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다. 말하지 못하는 것보다 듣지 못하는 것이 불편했다. 말은 덜 해도 되지만 듣지 못하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진행되는가 싶더니 서너 달 지난 요즘은 더 심해져, 보청기를 착용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구는 이명에 산수유가 이롭다 하고, 또 다른 이는 굴과 키조개가 좋다고 했다. 녹황..
[좋은수필]감실부처, 제행무상을 역설하다 /신홍락 감실부처, 제행무상을 역설하다 / 신홍락 (제13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금상 수상) 시큰둥한 첫 만남이다. 왕방울 눈을 지닌 감실부처를 건성으로 일별하고 돌아 나오는 뒤통수가 간지럽다. 향토 사학자 수준으로 설명하는 친구의 유식에 주눅 들어 딴청 부린 것이 부끄러워 발길을 멈춘다. 뒤돌아서 두 손을 모은다. 감실 안을 비추는 햇빛에 반사된 희미한 미소가 찌뿌둥한 마음 근육을 풀어준다. 민망한 여운이 오래 머문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전각 안쪽을 삐끔삐끔 들여다보고는 뜨락만 어슬렁거렸다. 찰나를 견디지 못하는 삿된 생각이 들락거리니 낯부끄러운 염치에 법당 주위만 맴돌았다. 남의 손에 이끌려 까치발로 들어가서도 지은 업의 무게에 눌려 조아린 육신을 일으킬 힘이 없음을 핑계 삼았다...
[좋은수필]바람의 말 / 최현숙 바람의 말 / 최현숙 누가 왔었나? 마당이 어수선하다. 담벼락으로 기어오르던 호박은 넝쿨째 떨어져 뒹굴고 텃밭 고추는 밭고랑에 드러누웠다. 휘어지게 열매를 키우던 자두나무 큰 가지도 꺾이어 우물가로 내려앉았다. 생기롭던 뜰이 밤사이에 상처투성이로 변해버렸다. 예보했던 태풍이 다녀간 모양이다. 널브러진 마당을 제쳐두고 농장으로 내달았다. 낙과 피해는 없을까, 쓰러진 나무는…. 사열관의 눈빛으로 천여 그루의 사과나무를 찬찬히 살핀다. 강풍에 시달려 후줄근할망정 제자리를 지키고 선 모습이 개선장군 같다. 농장의 나무들은 잘도 버티었는데 뜰 안의 자랑이던 자두나무가 팔 하나를 잃고 기우뚱 서 있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단물 든 열매들은 쓸리고 패여 말짱한 것 하나 없다. 내 짐은 줄이고자 안간힘을 쓰면서 과일은 ..
[좋은수필]익숙함과의 이별 / 이장희 익숙함과의 이별 / 이장희 은퇴자에게는 갖은 이별이 기다린다. 일터를 떠나는 자체가 충격적 헤어짐인데 건강과 돈, 가족과 친구도 멀어진다. 과장, 부장 호칭이 사라지고 세상 정보에 귀동냥도 쉽지 않다. 하여 은퇴 전과 다른 생활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종 망설임이 앞서지만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거기 맞춰 은퇴 후를 살아가고 있다. 의·식·주는 생활의 3요소다. 허나 빠르게 변화된 세상, 그 틀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 첫째인 옷衣부터 보자. 옷은 몸을 가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갖춰야 할 도구다. 외부로부터 감싸주는 보호막이던 것이 요즘은 편리함과 자신의 몸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그렇지만 나의 옷은 다르다. 퇴직 후 농사꾼이 돼 보니 일상복 아닌 농사용 의복이 아쉽다. 오래된 와이셔츠가 헐..
[좋은수필]물꼬 / 김옥한 물꼬 / 김옥한 담뱃불이 깜빡이며 도랑을 왔다 갔다 했다. 내일은 모를 내는 날이라 밤새 아버지가 물꼬를 지키고 있다. 며칠 전부터 수리조합 감독에게 모심는 날을 알려 주었기에 그날 도랑에 흐르는 물은 우리 우선이었다. 일할 사람 다 맞추어 놓고 물을 대는데 가끔씩 새치기하는 사람이 중간에 물꼬를 트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흙으로 된 봇도랑은 유실되는 물이 많았다. 강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었다. 큰 양수기로 물을 푸면 봇도랑이 가득 차고 넉넉하지만 쥐나 두더지가 낸 구멍으로 인해 터지는 수가 있어 위험했다. 주로 작은 양수기로 푸니 아래쪽 우리 논은 물이 조금씩 내려오거나 아예 끊겨 버렸다. 적은 양의 물을 서로 대려 하니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가뭄으로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
[좋은수필]굄대 / 최현숙 굄대 / 최현숙 군불 지핀 방이 후끈하다. 퀴퀴한 냄새가 훈기를 더하는 아랫목에 두레상이 놓여 있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장 김치와 청국장. 농사철이면 동동걸음을 쳐도 겨울이면 여유로운 그이 덕에 나는 가끔 이런 호사를 한다. 빈 그릇만 남은 밥상에 기분이 좋았던가. 상을 물리던 그이가 새해에도 된장 맛이 좋을 거라며 윗목에 자리 잡은 메주를 가리킨다. 그 손길을 따르던 내 눈은 한순간 놀라움으로 멈췄다. 곰팡이가 꽃처럼 피어 있는 메주를 달고 선 긴 나무틀. 그것을 기울지 않게 받치고 있는 것은 거듭 보아도 글 친구 넷이 쓴 우리 수필집이었다. 놀란 마음을 숨기며 시선을 돌려봐도 속에서는 쿵쿵 천둥소리가 났다. 그이와는 농장 이웃으로 만났다. 농사 초보인 우리는 일찍 농부인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좋은수필]촌부의 송덕비 / 신성애 촌부의 송덕비 / 신성애 화사한 꽃잎이 봄바람에 흩어진다. 저만치 젊은 내외가 복숭아꽃을 솎아내며 농사 준비에 분주하다. 발길을 멈추고 손 인사를 하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밭 끄트머리로 올라선다. 밭둑에는 손을 타지 않은 쑥이랑 달래가 지천으로 깔렸다. 멀리 가산산성이 보이고 구릉으로 둘러싸인 과수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골짝 비탈진 땅을 일구어 만들어낸 농장은 동네와 떨어진 곳에 널따랗게 자리 잡았다. 어디에선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본다. 따스한 봄날, 무덤가에 세워진 검은 돌의 송덕비가 햇살에 반짝인다. 누구일까. 커다란 상석에 우뚝 선 비를 보니 예사 사람은 아닌가 보다.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비문을 읽어 내려간다. 부림 홍공 연진 공덕비라 쓰인 뒷면에는 그 사람의 살아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