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소리샘 / 김옥한

소리샘 / 김옥한

 

 

귀 안쪽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린다. 양철 부딪는 날카로운 소리 같기도 하고, 드르륵거리며 맷돌 돌아가는 소리도 난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아보고 고개를 흔들어 봐도 소용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이명과 더불어 청력도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옆 사람 이야기에 되묻는 횟수가 잦아졌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다. 말하지 못하는 것보다 듣지 못하는 것이 불편했다. 말은 덜 해도 되지만 듣지 못하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진행되는가 싶더니 서너 달 지난 요즘은 더 심해져, 보청기를 착용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구는 이명에 산수유가 이롭다 하고, 또 다른 이는 굴과 키조개가 좋다고 했다. 녹황색 채소와 견과류까지 챙겨 먹어도 별로 치도가 없다. 석류가 효능이 있다 하여 생으로도 먹고 주스와 차로 달여 열심히 마시고 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다. 병원에서도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고 한다. 적당한 운동과 안정을 취하고 불편함을 그저 친구처럼 생각하라고 권유하는 정도다. 아직 보청기를 낄 정도는 아니라 하지만 이러다 일상생활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전남 보성의 강골마을엔 소리샘이란 게 있다. 담쟁이 우거진 고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담장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샘을 만날 수 있다. 옛날 인근 양반집 주인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제공한 우물이라고 한다. 우물가에선 아낙들이 빨래도 하고, 시댁 흉도 보며 수다를 떨었다. 자연, 동네의 이런저런 소문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누구네 집 딸 맞선 본 얘기, 어느 영감이 과수댁에게 추파를 던진 예기 등 동네 소식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났다. 이들의 예기가 궁금해진 집주인은 급기야 담장에 사각의 구멍을 뚫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구멍담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리샘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누가 억지를 무려 부당한 이득을 보았다거나, 어느 집은 끼닛거리가 부족하여 굶기를 밥 먹듯 한다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런데 소리샘에서 나눈 말들이 귀가 달렸는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양반들이 앞장서 벌을 주었고, 어려운 집에는 쌀가마가 놓였다. 그런 소문이 나돌자 소원을 들어주는 걸로 인식한 사람들이 밤이면 몰래 와서 가만히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일종의 신문고 역할을 한 것이었다.

네모난 우물은 삼면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물가엔 돌로 테두리를 둘러놓았다. 물 이끼가 가득하여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빨래터도 있고 주변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물 안에 가만히 손을 넣어 적셔보았다. 손등에 금방 초록물이 들었다. 혹 무슨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귀도 대어보았다. 솔바람 소리가 살짝 귓바퀴를 적시고 지나갔다. 이끼 낀 우물 속에는 하늘과 구름, 나그네의 얼굴만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젊은 시절, 다른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기보단 내 말만 하기에 바빴다. 상대방 생각은 대충 흘려들었고, 자신의 주장만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워져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진 적이 많았다. 잔소리가 심해서 남편과 아이들도 싫어했다.

공자는 육 십 대의 나이를 이순耳順이라 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서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의연히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이순이 자나면 젊었을 때와 달리 소중한 것들의 순서가 바뀌고, 욕망에서 자유로워진다. 귀에 거슬리는 말도 순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여 냉철한 사고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나이라고 했다.

소리샘은 이순의 귀였다. 마을의 온갖 소리를 들어주고 그것들을 조용히 해결해 주었다. 네모난 귀, 그러고 보니 물이 고인 우물은 웅숭깊었다. 싫은 소리는 소리대로, 좋은 소리는 또 좋은 소리대로 모든 걸 담아내는 가슴 넓은 귀였다. 어디 사람들뿐이겠는가. 바람이 미루나무 가지를 흔드는 소리며, 돌담 옆을 비집고 피어나는 알록제비꽃 몸짓이며, 깃에 묻은 이슬을 털며 날아가는 개개비의 날갯짓까지 소리샘엔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담겨져 있는 듯했다.

이순이 지난 내 귓속에도 혹 소리샘이 생긴 게 아닐까. 내 주위를 떠돌던 정처 없는 것들이 어느 날 거기에 모여 저마다 이런저런 소리를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의 말을 잘 귀담아듣지 않는 나를 깨우치기 위해, 그래서 마침내 강골마을의 소리샘처럼 깊어지라는.

요즘 들어선 젊은 시절 날카롭기만 했던 생각들이 어느 정도 무디어지기는 했다. 모임에 가면 친구들 얘기도 귀담아 들어주고, 아이들이나 남편에게도 잔소리를 덜하게 되었다. 말하기보단 듣기가 자연스러워졌다. 부정적으로만 보던 사물들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 것도 이즘이다. 젊은 날, 스스로 틀어막았던 귀를 논물 틔우듯 가만히 열게 되었다.

부처의 귀는 얼굴을 거의 덮을 정도다. 귀가 큰 것은 중생들의 온갖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한다. 천수보살은 그런 귀를 천 개나 가졌다 하니 그 웅숭깊음이 한량없겠다 싶다. 가끔씩 귀가 큰 사람을 보게 되면 왠지 호감이 간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줄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타인과의 소통엔 눈이나 입보단 귀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닐는지.

이명이 생기고부터 혼자 산책하는 일이 잦아졌다. 고즈넉한 길을 걷다 보면 시끄럽던 소리가 이내 잦아들곤 했다. 어쩌면 이명을 다스리는 건 산수유나 굴, 키조개들이 나니라 고요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않고 들어주기, 자신에게로 침잠하기, 샘처럼 웅숭깊어지기.

길가에 핀 민들레 귓바퀴 속에 노란 봄이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