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 최영애
오래전부터 건축공법에 관심을 가졌다. 독특하게 세워진 건물을 보면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바라본다. 엘리트 여자 건축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건축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자신이 건축한 대표 건물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건축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자신이 건축한 대표 건물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건축물 외관에 '내후강판'을 부착한 것이 특징이라 했다.
철판이 공기나 물과 접촉하면 산화작용이 일어나 쇠붙이의 표면에 녹이 생긴다. 녹이 슬면 강판은 더 강하고 단단하게 되어 철이 부식되는 것을 방지한다. 녹이 보호막이 되는 셈이다. 그녀 말에 따르면 녹이라는 새로운 건축자재로 개발된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질감과 색의 변화가 일어나므로 건축물을 보는 사람이 삶에 대한 기억과 건축의 역사까지 간직하게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알고 있는 녹은 부정적인 이미지여서 생소했던 터라 쉽게 그녀의 설명이 와닿지도 않고 이해도 어려웠다.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홍티아트'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초여름의 정오 햇살이 따가웠다. 인터넷으로 확인된 위치를 적은 쪽지 하나 들었지만 길에서 헤매게 되었다. 초행길인지라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공단지역에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금속 공단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유난히 빨리 찾아온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금속 공단에는 여기저기서 온통 쇠 깎는 소리만 요란하다.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엔진 소리도 바쁘다. 대한민국의 강한 경제력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듯 마음에 뿌듯함이 느껴진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걸었지만 안내표시는 보이질 않는다. 얼굴과 등 뒤로 땀이 난다. 혹시 지나쳐버렸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할 수 없이 공장 귀퉁이에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가 '홍티아트'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식당 사장님은 친절하게 이 길이 끝나는 위치에 작은 안내 간판이 있다고 했다. 그 위치까지 더 가란다. 알고 보니 절반의 길에서 찾아 헤맨 것이다.
'홍티아트'건물이 녹슬어 있다. 6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무성한 초록나무 잎과 대비된 색조가 더욱 붉다. 강철을 건축자재로 사용한 발상이 조금 느껴지기 시작했다. 녹이 주는 부정적인 생각과는 완전 다르다. 건물 외벽을 장식한 붉은 녹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낸다. 의미를 부각한 건축가의 능력이 비로소 이해된다. 손바닥으로 쓸어 보니 붉은 녹 가루가 묻어난다. 쇠붙이에 생기는 일반적인 녹으로 확인된다. 어떤 예술가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신비스런 색채를 띠고 있다. 건물이 잘 조각된 대형 조형 작품 같다. 이름에도 사연이 있다. 공단을 세우기 전 있었던 홍티 마을 이름을 따서 '홍티아트'로 붙였다고 한다. 금속 공단의 딱딱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바꾸면서 지역민들의 문화의식을 높여주고 예술창작 강의로 어린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일도 한다. 산업 직원과 향토 주민이 예술 공간 안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
내부는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설치미술 중심으로 7명의 입주 작가들이 활동한다. 갤러리에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은 주변에서 흔히 사용했던 폐품들이 소재가 되어 작가들의 손에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된다. 보기에 편한 작품도, 눈으로 느낌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난해한 시를 읽듯 신기하게 보인다.
오르는 계단옆 벽도 붉은색이다. 2층은 작가들의 창작공간이다.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3층 옥상으로 올랐다.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다. 건너편에서는 낙동강물이 바닷물과 반갑게 얼싸안고 있다. 공단 조성으로 기능을 잃어버렸지만 한때 활기 넘쳤던 홍티 포구가 좁은 수로 형태로 남아있다. 포구에는 녹슨 폐선들이 깨어나지 않고 잠을 잔다.
이곳 '내후강판'의 녹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때 저 배도 거친 파도를 넘어 만선의 깃발을 세우고 포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더 오랜 후면 폐선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풍어와 바다의 애환을 기억하고 있는 저 포구 파도만 사라지지 않으리라. 폐선의 녹을 바라보는 마음이 찡하다.
사람에겐 녹이란 삭아드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도 문을 닫으며 가슴에 녹이 슬고, 황혼 길 인생을 녹슨 인생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소멸해 간다. 자연이 허용한 것만큼만 살다가 삭아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내후강판'의 녹은 삭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녹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녹 슬은 것처럼 서운했던 관계도 풀고 나면 더 친밀해지는 사이로 이루어진다. 힘겨운 삶도 세월을 디딤돌로 삼아 활기찬 생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픔도, 미움도, 상처마저 제 몸 부수는 녹의 아픔을 거치면 비로소 아문다. 붉은 가슴으로 남은 생을 더 단단하게 살아볼 일이다. 온통 삭아 부서져야 상처들도 아물어 가는 것이 오늘 만난 '내후강판'이 내게 남기는 큰 교훈이다.
하루의 녹인 양 어느덧 저녁노을이 홍티 포구 하늘 위를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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